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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0.03.23 아이큐(IQ)와 공부성적, 왜 상관이 없을까? 12
  2. 2010.03.17 공부 잘하는 법 _욕심이 있어야 한다 1
  3. 2010.02.24 공부의 신 마지막회 줄거리 _16화, 길풀잎(고아성), 오봉구(이찬호) 천하대 합격, 황백현(유승호) 태평대 합격 _10.02.23 7
  4. 2010.02.11 대학 등록금 분할 납부제 도입하자 1
  5. 2010.02.10 대학 등록금 신용카드 납부 설득력 있나? 4
  6. 2009.06.12 전경, 경찰 집단폭행 충분히 가능하다
  7. 2009.06.09 서울대 전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김바니가 자신의 아이큐(IQ)를 153으로 밝힌 가운데, 인기 여배우 김태희의 아이큐도 '148'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면, 아이큐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창의적이거나, 학교 성적이나 입시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수치화된 이런 기준보다는 자신이 인생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행복감', 인생의 '가치'가 우선시되야 한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아이큐(IQ)가 모든 지적(知的) 성취 조건의 우월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 일까?

왜 아이큐는 높아도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있고, 모두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멘사(mensa)가 인터넷에 '샘플'로 공개하고 있는 아이큐 테스트의 문항을 보자.
39문항을 제한시간 40분 안에 보기에서 선택해서 푸는 방식이다.

그 한 문항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유추'를 통해 논리적인 관계를 이끌어내는 문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지적 능력은 우리 말로 풀면 '재치'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이나 수능 입시 평가 방식을 보면, 단순히 '재치', '눈치'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2010년 최근에 실시된 수능 '수리영역' 기출문제를 보자.
이런 문제의 난이도는 결코 어렵지 않지만, 평상시에 공부를 안하면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싸인(sin)이 뭐고, 탄젠트(tan)가 뭔지 교육과정에서 수업시간을 잘 따라가지 않으면, 전혀 풀 수가 없다.

다른 과목, 영역도 마찬가지다.
수능 외국어영역에서 '영어' 지문이 아무리 쉽게 나온다 한 들, 단어의 뜻을 모르고 있고, 미리 구문 읽는 법을 '지식'으로 '암기', '숙달'해 놓지 않으면 전혀 손델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교육제도, 대학 입시제도는 기회의 '평등'을 제공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더 노력하는 사람이, 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더 높은 학업 성취도를 달성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 더 한 사람을 확실하게 '학업 성취도' 면에서는 대접해 준다.
위의 멘사(Mensa) 아이큐 테스트 문제처럼, 전혀 개인적 노력과는 상관없는 그런 문항은 출제 비중이 적으니까 말이다. 

단순히 아이큐(IQ)간 높다고 해서, 반드시 '학업 성취도'가 높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아이큐는 높았지만, 공부는 별로인 친구들도 경험상 많았다.
반대로 아이큐는 보통이지만, 개인의 탁월한 노력으로 높은 성적을 이끌어 내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관련글]
공부 잘 하는 방법 _욕심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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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드라마 '공부의 신'이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공부'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그래도 '경쟁'을 옹호하는 주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교육의 목표는 바른 지식, 정확한 지식, 합리적인 사리 판단 능력을 후세에 전달하는 데 있으므로, 교육과정을 잘 이수해서, 각종 평가나 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면 참으로 권장할 만한 것입니다. 


[학교 성적과 인생의 성공 비례하지 않아]
하지만, 중고등학교 학교 성적이 좋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학교 성적이 성공과 반드시 비례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나고 보면, 중학교, 고등학교의 '공부'라는 것도 그 수준이 그렇게 높다고 볼 수는 없거든요. 

학교가 전달하는 '지식' 자체보다는 오히려, 공부와 인생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 더 적절할 거 같아요.

이는 대학교 '성적', '학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은 하지만, 잠정적인 사회 진로와 연관성이 크기 때문에 논외로 하겠습니다. 


[초,중,고 공부 잘하는 비법?]
그래서, 초, 중, 고등학교 과정에 대해서만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이번 글은 그 첫 편으로, "공부하는 데 무엇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가"를 말해 보도록 할께요.

참고로, 저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그럭저럭 떨어지지는 않게 공부했으며, '수능'에 있어서는 거의 '도사급'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지금도 '수능' 문제지는 수월하게 보입니다. (자랑이 아니며, 글을 졸필이나, 어느 정도 신뢰성은 있다는 점입니다.)


초, 중학교 과정에서 '성적'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이 때까지의 학업이 그리 깊이가 있지 않고, 대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 사정 점수와 바로 직결되지 않기 때문이죠. 즉, 대학교 입학에서는 고등학교 성적, 내신만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만 잘하면, 일단 대학교 진학을 향한 '경쟁'에서는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공부도 어디서 뚝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초등, 중등학교 과정이 연장되는 것이고, 평상시 '수업'이나 '학습' 태도, 습관이 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에서도 마냥 놀아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공부 잘할 수 있나?]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왜 공부해야만 하는가?"를 공부하는 학생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 공부를 할 수도, 잘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공부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을까요?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 '당위성'을 스스로 찾아서 깨우쳐야 합니다.
 
어떻게 깨우칠 수 있을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를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합니다.
'욕망'의 '의지'의 근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욕심'(慾心)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마음', '욕심'은 사실상 '동의어' 입니다.


['욕망', '욕구', '호기심'을 자극]
그런데 사람은 애초에 '호기심'(궁금증)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누구나 지적(知的) '욕심'이 있습니다.
제한적인 자원을 향한 '욕망'이 있기 때문에 '욕심'이 생겨난다고 봐도 역시 무난합니다.

예) 우주와 인간의 근원과 종착점이 궁금하지 않니? 전문적으로 크게 성공해서 BMW 타고 싶지 않니?
사회의 '구조'를 진단하고, '개선'해 보고 싶지 않니? '질병'과 '환경'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지 않니?
크게 '돈'을 벌어서, '떼부자'는 아니어도, 가치있게 쓰고 싶지 않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욕구'의 근원을 깨닫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열렬한 '의지'가 생겨나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공부를 해야 겠다'는 '성취 욕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초.중,고등학교 '공부'는 '수단'에 불과]
왜냐하면, 고등학교까지의 '공부'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공부' 내용은 그렇게 수준이 높지 않습니다. 그냥 인생 살아가는데 모자르지 않을 만큼, 기초 '지식'을 전달하고,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숙달'시키는데 기본 목표가 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까지의 공부는 차기의 진로, 연구를 위한 '과정', '수단'이라고 봐도 무난합니다. 

그래서, 초,중,고등학교 과정의 학생들에게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면 충분합니다.  


[인생의 '행복감'을 자극하고, '간접 경험'을 넓게]
그렇다면,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직 학생 본인 스스로 깨우치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행복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런 '깨우침'을 학생 스스로 깨닫게 하려면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학생 스스로의 '호기심'을 자극시켜 줘야 하고, '세상을 넓게 조망할 수 있도록' 미리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연장자들이 쓴 '책'을 학창시절에 많이 읽으라고 하는 것이죠.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인생을 더 산 사람들의 소중한 체험을 '간접 경험'으로 미리 들여다 볼 수 있거든요. 


[욕구 해방의 근원인 '욕망'을 지녀라]
결론적으로 공부를 잘 하려면, 그 첫째는 무엇보다 우선 '욕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욕하고자 하는 마음가짐(慾心)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려고 나설 수도 없고, 무엇을 해내겠다는 '용기'도 생길 수도 없습니다.
'욕망'이 없는 곳에 '의지'와 '성취감'이 따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해할 거 같아,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과 '욕구', '행복감'의 근원은 단순히 고등학교 성적이나, 대학교 입학으로 줄세워 지는게 아닙니다. 




예) 예컨대, 어떤 학생은 진짜 시험을 잘봐서, 경쟁이 치열한 '전문 시험'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발견할 수도 있고, 
다른 학생들은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것, 특정 아이템을 실현시켜 장사로 성공해 보는 것, 기타 여러 가지를 목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즉, 인생을 살아가면서 발견하게 될 '자기실현'의 '가치'는 실로 다양합니다.
본인 스스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주관적인 '욕망' 실현을 위한, 구체 타당한 '공부'가 되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어떤 과정이든 국,영,수,사,과는 잘 하면 좋은데, 이유는 모든 경우에 적용 가능한 '논리'를 습득하기 때문이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욕심'을 형성하고, 그것을 달성해야 겠다는 '의지'를 실현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야 합니다.

현재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 '수단화' 되어 있는 중,고등학교 학업 과정의 '성적표', '수능 성적표' 그 자체가 '성공'을 위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보장수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경쟁적인 대학 진학 과정에서 '유리한' 조건은 된다는 것이죠. 적어도 '장애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대학 입학 할 때까지는' 그렇습니다. (그 이후에는 또 열심히 해야 하죠.)

'욕심' 이게 제일 중요하구요. '공부 잘하는 비법', 다음 편에서는 다른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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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 1단계 전형 결과가 드디어 발표되는데, '천하대 특별반' 학생들은 어떤 결과를 얻었을까?

길풀잎(고아성)이 '생명과학부'에 합격하고, 오봉구(이찬호)는 '수의예과'에 예비합격한다.
황백현(유승호)도 물론 지원한 대로 1단계 전형 합격 결과를 얻었다.

반면에, 나현정(티아라 지연)은 불합격하고, 홍찬두(이현우)는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홍찬두가 괜찮은 수능 성적에도 불구하고, 천하대에 지원을 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이 '대학 진학'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으로, '천하대 특별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천하대 특별반' 학생들간에 위로와 격려, 축하가 계속되는 가운데,
홍찬두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고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1년간의 유예 기간을 허락받는다.



한편, 할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황백현은 나름대로 고심을 하는데,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진로는 '한의대'에 진학하여 한의사가 되고 싶은 것인데, '천하대'에는 한의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황백현은 고민을 하는데, 한수정(배두나), 강석호(김수로)와 할머니의 격려로 용기를 얻고, 한의대가 있는 '태평대'에 지원하여 면접을 보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논술 시험과 면접 고사일, 
모두가 무난하게 시험을 치뤄, 길풀잎과 오봉구가 '천하대'에 최종 합격하고, 황백현은 '태평대' 한의예과에 진학하게 된다.

또한, 남겨진 나현정과 홍찬두도 실망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을 응원하며, 나현정은 자신이 원하는 미술 부분에 매진하고, 홍찬두는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천하대 특별반 학생들과 '공부의 신' 선생님들의 이별의 시간, 
교실에서 작별의 인사와 환송회가 열리는 가운데, 

선생님들은 저마다 '인생의 조언'을 남긴다.



그리고 강석호도 '병문고'와 '천하대 특별반'에게 작별의 인사를 남기는데, 
이들이 경험한 '천하대 특별반'은 단순히 '천하대를 가고 마느냐' 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생의 교훈을 얻어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몇몇 '공부의 신'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자.

수학의 신 차기봉(변희봉) - "너희들이 대학에 합격하든 안하든,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너희들을 가르쳤고, 너희들은 기를 쓰고 배웠으니까 그것으로 된 거지, 무얼 더 바라겠니. 내가 '수학 비법'으로 가르친 것들은 사실 '비법'이 아니었어. 누구든지 열심히 공부하고 알려고 애만 쓴다면은 알 수 있는 것들이었어. 수학 문제를 열심히 풀었던 것처럼 인생을 살면 누구든지 비법을 품은 도사가 될 수 있다. "

영어의 신 양춘삼(앤서니양, 이병준) - "여러분들은 이미 인생의 합격생... 여러분과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

강석호(김수로) -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합격했든 안 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은 이미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부다. 진정한 공부란 인생을 옳바르게 사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공부의 신'이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모두가 아쉬움 속에 '이별'하는 가운데, '천하대 특별반' 학생들은 떠나가는 그에게 '선생님'의 칭호를 남긴다.
강석호는 변호사 사무실을 다시 열어 본업으로 복귀하고, 나현정 선생과 이사장 장마리는 강석호를 그리워하며 더욱 학업에 매진한다.

한편, 대학에 진학한 길풀잎, 오봉구, 황백현은 무난하게 대학 수업을 따라가고,
나현정은 그림으로, 홍찬두는 일단 '춤'으로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 만난 황백현과 강석호의 즐거운 웃음 속에, 공부의 신 대단원을 마무리한다.

아듀 Adieu 공부의 신~~ ^^

방송시간 : KBS2 드라마, 월요일, 화요일 저녁 09:55분 (2010.01.04 첫방송~, 마지막회 방송일자, 2010.02.23)

공부의 신은 KBS 홈페이지에서 로그인하여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공부의 신 마지막회 다시보기]

[관련글]
공부의 신 15화 줄거리
공부의 신 전체 줄거리 보기 _1부(1화)~16부(16화)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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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등록금 납입 시즌이 다가오면서, 언론지들마다 이를 주제로 여러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 언론지와 방송에서는 "대학 등록금의 카드 결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주장은 대학 등록금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는 것으로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현재 국내 대학 등록금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1) 원금이 너무 크다.
   - 즉, '대학 등록금'의 절대 규모 자체가 큰 부담이고, 상승률도 빠릅니다.

2) 대학 등록금에 대한 사회/재정적인 제도 지원이 미흡하다.
   - 즉,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면, '성인'이 되었음에도 도저히 '학생들'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수준이고, 제도적인 뒷받침도 안되어 있습니다.

이 두 문제가 '대학 등록금'의 본질적 '이슈'라고 할 수 있으나, 

특정 대학과 관련없음

다른 긴요한 문제들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등록금 납부'의 기술적(technical)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국내 대학들은 예외없이 "등록금"을 오직 "일시불", "사전 결제"로만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백만원에 이르는 금액을 '일시불'로 만들어서 납부하기란 서민들에게는 큰 부담입니다.
굳이 '서민'들을 찾지 않더라도, '학생들' 스스로에게 큰 짐이 됩니다.

그런데, 서두에서 밝힌 언론지들은 엄청난 규모의 "등록금"을 일시불로 납입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되므로, "신용카드 결제를 도입해서, 신용카드로 할부라도 끊게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일시불 납부 등록금"의 본질을 비켜가면서, 본질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으므로, 결국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임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관련글, 대학 등록금 신용카드 결제, 설득력 있나?]

"일시불"로 내야하는 대학등록금이 부담인 것은,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일시불"로 결제해야 하는 "결제 방식"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용카드로 할부 끊게 해달라"고 찾기 이전에, "대학들에게, 등록금을 할부로 받을 생각이 없냐?"고 의사타진해 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대학들이 등록금을 "일시불"로만 수취하고 있기 때문에 등록금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대학 등록금 분할 납부 방식의 한 예(example)


대학등록금을 분할 납부할 수 있게 기술적(technical)으로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학생들과 사회적인 부담은 크게 완화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학기 시작하기 전에 등록금의 절반을 내고, 학기가 마감하면 등록금의 나머지를 내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대학등록금' 원금이 똑같기는 하지만, 기간이 분할되면서, 학생들이 등록금 마련과 납부의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는 '2회 분할'을 예로 들었으나, 3회 이상의 분할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편, 대학은 '등록금 분할 회계 처리'로 회계상의 불편함은 있겠지만, 학생들의 애로사항을 반영할 때,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1년 대학예산도 12개월로 나뉘어 집행되는 것이므로, 굳이 "등록금"을 한 철에 몰아서 "목돈"으로 수취해야할 절대성은 없습니다.
수취해야할 금액이 분할이 되면서, "기간비용"이 걱정이라면, 대학은 분할납부를 선택하는 학생들에게 연율에 따른 '소정의' 이자를 물론 추가할 수 있습니다.

왜, 등록금은 꼭 "일시불"로 내야 할까요?"
등록금 분할 납부제"를 도입하면, 일시불에 따른 재정적 부담이 다소 완화될 수 있습니다.
'일시불 등록금 부담'은 "신용 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존의 관행을 너무 당연시하여, '불편함'과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것이 '적절한 것인가?', '편리한 것인가?'하는 의문을 종종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등록금을 학기 시작 전에 꼭 "일시불"로만 내야한다는 그 어떤 필연성도 없습니다.

즉, "대학 등록금 분할 납부제"는 대학과 학생들 스스로의 선택으로 충분히 즉시 도입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책입니다.
추가적인 부담도 거의 없으며, 다만 행정적인 일처리가 소폭 늘어나는 수준일 겁니다.

p.s.
* 한편, 대학등록금을 분할납부할 수 있게 해주는 일부 대학들이 이미 있으나, 위의 글은 이를 '공식적인 제도'로 전대학에서 실시하자는 의견입니다.

또한, 분할납부가 실시되는 경우에도, '학기전 1/2 납부- 수업주수 1/4~2/4 전에 나머지 1/2 납부' 식으로 그 텀(term)이 매우 짧기 때문에, 실효성에 의문이 있어서, 분할 회수와 분할 대상 기간을 연장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 즉, 애초에 '카드사'에 수수료 떼일 일 없이(학교, 학생들 모두 불리하므로), 학교 자체적으로 '대학 등록금'을 분할 납부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편의를 봐주면 된다는 겁니다.

- '신용카드'는 '빚'일뿐 아무 것도 '현금 단지', '돈 단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용불량자'만 양성할 뿐입니다. 대학생들이 '신용불량자'되면 어떤 길로 빠지게 되는지 아십니까?

* 또한, '대학들'도 '교육상품'이라는 '상품'을 팔기는 매한가지인데, 왜 '신용카드' 결제를 안해주냐? 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대학교육이라는 상품이 비싸면 안사면 되지, 왜 굳이 살려고 하냐?'하고 '등록금'이 비싸다고 항변하는 학생들에게 같은 논리로 다시 반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싸면 안 사먹으면 그만이고, 수요-공급에 따라, 시세가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육을 단순히 '상품'으로 보고 '신용카드' 결제의 대상이 되야 한다고 논리 전개하는 것은, '논거'의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관련글]
대학 등록금, 신용카드 납부 설득력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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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2월 10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등록금 카드 납부 외면...서민들 '사채 덫'에 빠뜨려' 제목 하의 기사가 네이버 뉴스캐스트를 포함한 포털 인터넷 지면의 주요 뉴스로 올라왔다.
MBC에서는 저녁 '9시 뉴스'에서 이와 동일한 논조로 기사를 내보냈다.

물론, 이런 기사와 주장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적절하지 못한 논리 구성과 기분에 따른 기사 송출 행위는, 기사를 읽는 다수의 독자로 하여금 현상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더 본질적으로는 "신문 자체의 격조"를 떨어뜨린다.

따라서, 위의 기사가 어떤 "논지 전개"와 "결론 구성"의 문제점을 지니고,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지, 여기에서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경향신문 기사, "등록금 카드 납부 외면...서면들 '사채 덫'에 빠뜨려" 이 글의 논지 전개와 주장을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 해당 기사 주장] (관련기사 보기)
각 대학에서 대부분 "등록금 납부"는 "신용카드"로 받아주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은 큰 자금인 "등록금 납부"에 애로사항을 겪고 있으며, 일부 "서민"은 사채까지 써야 하는 "덫"에 빠져들기도 한다.
다른 "카드 결제" 대상과 마찬가지로, 대학등록금도 신용카드 결제의 대상이 되야 한다.


이제, 이 주장이 과연 적절한지 살펴보자.
일단, 여기서 필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대학등록금도 굳이 신용카드 결제의 대상에서 제외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와 본질, 결과는 위 기사의 기자가 주장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다.

'신용카드가 이미 있고, 한도가 되는 사람은 대학등록금도 카드로 결제할 수 있다.'
어차피 신용카드가 있는 사람이면, 신용카드의 여유 한도가 허락한다면, 대학등록금도 자기의 선택에 따라 '신용카드'로 하든지, 말든지 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용카드로 대학등록금을 결제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대학등록금의 문제가 개선된다거나, 등록금 납부자의 부담이 전혀 줄어드는게 아니다. 오히려 늘어난다." 

위 경향신문 기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용카드' 결제를 허락하면, 서민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1. 신용카드 결제의 3가지 기능 - 할부결제, 일시결제, 현금서비스, 대출 
먼저, 신용카드의 주요 기능을 살펴보면,
1) 상품(물품, 서비스) 구매에 따라 '할부결제', '일시결제' 기능을 제공한다.
2) 일부 유망 고객군에게 '현금서비스',
3) 신용도 높은 고객군에게 '대출' 서비스를 추가로 제공한다.


일시불, 할부가 '풀품구매' 선 대행결제 서비스라면, '현금서비스', '대출'은 카드회사가 카드소지자에게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자기 금융 사업이다.(다시 말하면, '돈놀이' 이다.)

만일, 신용카드로 '대학등록금 결제' 서비스가 시행된다면, 1)과 같이 물품구매 결제 기능이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2)와 3)과 같은 식으로도 될 수 있는데, 이는 신용카드로 직접 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카드로 확보한 "현금"을 "등록금"으로 쏟아 넣는 식이기 때문이다.


2. 신용카드는 높은 취급 수수료 수취
신용카드 회사는 상품(물품 및 서비스) 제공자와 구입자간의 거래를 중간에서 결제 중개하면서, 높은 수수료를 가져간다. 
국내 신용카드 회사들의 1년간 당기순이익이 왜 수 조원대에 이르는지 그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A라는 상품제공자가 B라는 구매자에게 '상품'을 팔았는데, B가 신용카드로 결제했다면,
이는 신용카드사의 선결제, 자금제공으로 빠르게 판매대금을 회수할 수 있지만, 할인 요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할인율은 몇 프로(%)에서 십 프로 근처까지 육박할 수도 있다.

한편, B입장에서는 '신용카드' 사용으로 편의를 보는 것 같지만, 위 3자간의 거래관계를 청산하려면 종국적으로는, 자기가 신용카드 회사에게 물품 구입 대금을 '결제'해야 하므로, 결국 '부채'(빚)으로 쌓여지는 것이다.
(카드= 빚 이라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결국, 신용카드사는 '신용카드'의 명목으로 상품 매매 결제를 중간에서 중계하면서, 엄청난 수수료 이익을 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 등록금"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과연 "대학"에게 도움이 될까 생각해 보자.
대학의 주요 운영자금은 결국 "대학 등록금"에서 나온다. 말 그대로 "학비"다.
학비를 "신용카드"로 결제하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수수료"가 카드회사로 빠져나가면서, 결국 대학의 재정상태가 그만큼 축소될 수 밖에 없다. 

대학을 넓게 보면 "교육 상품 판매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과는 다르기 때문에, "수수료"로 빠져나가는 대학 재정의 축소는 결국 학교 서비스의 질적 하락으로 나타난다. 불필요한 "비용"이 나간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대학교의 "등록금 납부"에 따른 재정이 100억이라고 치면, 이 중에 2~10억이 "신용카드 수수료"로 나가도, 엄청난 타격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그 돈을 학교복지, 학생들 장학금으로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다못해 3억이라고 쳐도, 100명 남짓한 학생들이 한 학기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 돈을 왜 신용카드사한테 "수수료"로 불필요하게 떼줘야 하는가 이 말이다.
 

3. 신용카드 할부결제, 현금서비스, 대출은 높은 수수료와 이자비용 부담 (연리 10%~20% 이상 수두룩)
위의 경향신문 기사에서, 기자는 대학등록금도 신용카드로 할부결제가 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대출로 대학등록금을 충당하라고 했다면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수 백만원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여유가 없는데, 일시적으로 신용카드 금융서비스로 '현금'을 융통한다더라도, 그것을 빨리 값아나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 '대출'은 아주 급한 자금, '급전'으로 월간 2%를 육박하는 높은 "이자"가 수취되는데, 연간으로 치면 20%를 넘어선다.(물론 신용도가 좋을 경우 더 낮아지지만, 대체로 10~20%에서 벗어나지 않을 걸로 본다.)

그렇다면, 대학등록금을 '할부결제'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 오케이(OK)일까?

"할부결제"라는 것도 자금의 회수 시기를 기간으로 연장해서 나눠주는 신용카드회사의 "금융서비스"의 하나이기 때문에, 할부 결제에 따른 "이자"가 당연히 발생한다.
'할부결제"의 이자율은 위의 "금융서비스" 이자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할부결제"라는 "편의"는 제공되지만, 할부결제에 따른 높은 "이자 수수료"가 발생하고, 이는 "대학등록금 납부자" 본인들에게도 매우 큰 부담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등록금이 300만원이라고 한다면, 이를 1년간 "할부 결제"로 납부하면, 1년간 납입해야할 금액은 원금+이자까지 합쳐서, 삼백수십만원에 이를 수 있다.


4. 신용카드 한도 몇 백만원 되는 사람 많지 않아 - 신용카드 한도가 몇 백만원이면 이미 "중상류층"에 해당
다음으로 본질적인 "신용카드" 사용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대학등록금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려면, 우선 "신용카드" 한도가 '대학등록금'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300~400만원대라고 친다면, 신용카드 한도는 400만원대 이상, 500만원에 육박해야 한다는 소리다.

과연, 대한민국 서민 중에 누가 그만한 '신용카드' 한도를 가지고 있을까?


왠만한, 대한민국 서민 중에 '신용카드'를 소지하고 있는 것도 명예스럽겠지만, 그만한 '신용카드 한도'를 가지고 있으면, 아마 '최상류층 서민'일 것이다.

즉, 신용카드를 보유하고, 한도가 그 정도이면, 이미 경제적으로는 중상류층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민층에 덫이 되는 대학등록금 신용카드 납부 거부'...이와 같은 문구의 경향신문 해당 기사는 설득력 없이, 논점만 일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채까지 내몰리는 서민들이 몇 백만원 여유 한도의 신용카드를 과연 보유하고는 있겠는가?" 너무 상식적인거 아닌가.

이 기사는 '신용카드로 대학등록금만 결제할 수 있으면' 마치 '대학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어디 사실이 그러냐...이 말이다.

오히려, '결제 수단'이 아닌 '대학등록금' 자체의 관점에서 기획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5. '부모'와 같은 타인의 신용카드 명의로 대학등록금 결제하는게 과연 떳떳한 걸까?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대학생 중에 과연 누가 '신용카드'로 '대학 등록금'을 결제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위의 경향신문 기사는 "대학등록금을 신용카드를 보유한 부모가 결제해야 한다"는 것을 마치 당연한 "전제"로 깔고 시작하고 있다. 하기에, 이런 논점에 대해서는 아예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대학등록금을 부모가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대학등록금'을 '부모'가 챙겨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이지, 매우 당연한게 아니다. 
그런 마당에, 이제는 '부모 신용카드로 대학등록금을 결제하게 해달라.'고 뻔하게 주장하는 위의 기자의 주장이 과연 적절한가...이 말이다. 

부모 신용카드로까지 대학등록금을 결제하라고 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는가 이 말이다.
오히려 '학생 자기 명의'로 충당할 수 있는 '사회적인 금융서비스'의 마련이 더 절실하지 않은가... 그것이다.

그렇게, '대학등록금'이 걱정스러우면, 차라리 '대학등록금'을 깍거나 동결시키라고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서 설득을 하거나,
혹은 '금융 서비스'가 걱정이라면, '대학등록금 대출을 저금리로 대폭으로 확대시켜라'고 주장하는게 차라리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거다. 

아니...'대학등록금을 (서민이 이용할 수도 없는, 이용해도 엄청난 추가부담을 남기는) 신용카드 결제가 되도록 허락한다고 해서, 도대체 대학등록금 문제의 뭐가 개선되느냐" 이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현실" "현상"에 대한 충분한 검토없이, 단순히 "격"하게 쓴 위와 같은 신문기사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물론이고 해당 신문의 격조를 크게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신문기사는 "지면"으로 문자로 작성되는 만큼, "기획 기사"로 충분히 여유있게, 깊게 검토하여 설득력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결론이 제시되어야 한다.

데스크에서도 기사의 '결론'이 아닌, 결론에 이르게 되는 기사의 '논리적 전개의 과정'은 문제가 없는지 잘 살펴봐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펜(Pen)으로 움직이는 "신문"에서 그 생명력과 영향력은 결국 "논리"(Logic)에 있기 때문이다.
해당 신문사나 기자 모두 앞으로 더욱 분발하기를 바란다. 이런 지적은 '9시 뉴스'에서 나타난 MBC에게도 물론 유효하다.

p.s.
이 문제에 대한 저의 견해를 밝혀 보겠습니다.
현재 대학 등록금의 논점은 1) 그 금액이 과다하고, 2) 금융/재정적인 사회적 지원이 약한 것에도 있지만,
기술적으로는 각 대학교에서 등록금을 "일시불"로 받는데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즉, "신용카드로 할부 끊게 해달라"고 찾기 이전에, "대학들에게, 등록금을 할부로 받을 생각이 없냐?"고 의사타진해 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과도한 일시불 등록금 부담은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대학들이 등록금을 "일시불"로만 수취하기 때문에 가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학기 시작하기 전에 등록금의 절반을 내고, 학기가 마감하면 등록금의 나머지를 내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똑같기는 하지만, 기간이 분할되면서, 학생들이 등록금 마련의 여유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학은 '등록금 분할 회계 처리'로 회계상의 불편함은 있겠지만, 학생들의 애로사항을 반영할 때,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1년 대학예산도 12개월로 나뉘어 집행되는 것이므로, 굳이 1년 예산을 "등록금" 한 철에 몰아서 "목돈"으로 수취해야할 절대성은 없습니다.

왜, 등록금은 꼭 "일시불"로 내야 할까요?"
등록금 분할 납부제"를 도입하면, 일시불에 따른 재정적 부담이 다소 완화될 수 있지요?
이거는 "신용 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즉, 본질적으로 본다면, "등록금 분할 납부제" 도입으로 글의 주제를 잡아가는 것이, 기사가 더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도입해 볼 만 합니다.

[관련글]
대학등록금, 분할 납부제 도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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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일 6.10항쟁 22주년 기념일을 전후하여 또다시 자행된 경찰, 전경집단의 폭력사용과 집단적인 폭행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경찰과 전경집단의 이런 야만적인 행태는 이미 작년 촛불집회 정국에서부터 수도 없이 지적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문제제기되고 있는 내용에 속합니다.

이들의 만행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들이 경찰 수칙이나, 전경 복무규정을 제대로 숙지하고나 있는 것인지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경찰과 전경집단의 생명의 위험도 초래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 사용은 계속 지적되었고 알려지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도 이런 경험을 다수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없는 전경, 경찰의 폭력 행사

저의 경우, 작년에 촛불집회에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 혹은 집회의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는 것을 목격하고, 집회자체가 전경들과의 극한 대립으로 불상사를 초래할 것이 걱정되어 많이 참여한 바 있습니다. 

집회 자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기 보다는 지켜보면서, 전경들이나 경찰들과의 불필요한 대립으로 상호간의 물리적인 폭력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도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전경들도 대부분 20대 초반의 어린 젊은 사람들이고, 이런 시국에 대한 경험은 물론, 이런 종류의 대형 집회, 시위의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고 주눅이 들어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30대를 넘어가는 세대들만 하더라도 집회시위기 사실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시위를 하더라도 전경, 경찰들과 사전에 암묵적인 타협을 하고 '보여주기' 식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사실 많았었습니다.

즉, 서로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위한 어떤 '쇼(show)'를 하지만,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서로 어느 선은 넘지않는 
암묵적인 타협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국의 집회시위의 원인, 방식 예전과 전혀 달라

그러나, 지금의 집회시위는 정권과 정국, 민주주의 전반이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그 추동세력과 집단도 어떤 '단위'나 '조직', 적어도 '대학' 사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상 '소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결사로
진지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 '여학생'들, 젊은 '결혼여성'들이 참여자들의 다수를 차지하여 주축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전의 소위 '운동권'의 조직화되고 보여주기 식의 집회시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며, 
본질적인 분노와 정권에 대한 질책을 '시민사회', '시민', '대중' 전반이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시민혁명'의 환경입니다. 


그렇다면, 왜 '폭력'이 수반되지 않고 있느냐구요?

이미 상황은 시민혁명 수준이고, 정권은 이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지고, 대응을 내놓아야 합니다. 
시민들이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의 참 뜻'에 대한 시민의 의식이 성숙했기 때문이고, 저와 같은 사람들이 '전경, 경찰'과 '시민'들간의 불필요한 대결과 폭력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조용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폭력'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화염병', '쇠파이프'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일시적인 '집회'나 '시끄러움'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물리적인 폭력이 수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시민들은 그 만큼 배웠고, 성숙했고, 자기의 책임과 권리, 권리의 행사와 의무를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장전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 뿐이며, 그것은 '내가 누리고 있는, 누려야 할 민주주의' 안에서 정당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몸으로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로 화답하지 양보하지 않는다

이런 정국과 현실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하고, 정권과 공권력이 무수한 직접적인 경고와 조기 경고신호(alert)를 무시하고, 
여전히 막 나간다면, 이러한 '고요'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역사적으로 지나간 이야기로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개념필연적으로 언제나 '피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왜 '민주주의'가 무섭다고 생각합니까?

민주주의가 교과서에나 나오는 하찮은 얘기로 치부한다면, 시민들은 '민주주의'는 분명히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현실을 부정하는 권력의 교만자들에게 응당의 댓가를 선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무서움이고, 위정자들이 항상 두려움을 느끼고, 경건하게 양심을 다하여 국정에 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권력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화된 폭력 사례

제가 작년의 촛불집회에서 노파심으로 옆에서 많이 지켜봤으나, 실제로 느낀 전경, 경찰집단의 폭력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공권력 남용과 법적인 불법에 따르는 '폭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보여 논외로 하고, 물리적폭력의 사례만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경험담을 말씀드리면,
전경들이 광화문사거리에서 집회자들을 해산하는데, 다 해산하여 뒤로 물러나는 마당에, 혼자 뒤쳐진 어린 여대생이 뛰어가다가
도로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이에 그 여학생을 좇던 전경이 그 여학생을 향해 방패를 날렸습니다. 방패로 찍은 것이 아니라, 방패를 아예 그 여학생한테 날려서, 그 여학생의 머리를 살짝 빗나가서 맞았습니다. 고의적으로 여학생의 머리를 향해 방패를 던져서 날렸습니다. 
간신히 비켜가서 망정이지 정면으로 맞았으면 최소한 뇌진탕에 걸리거나 했을 것입니다. 

혼자 쓰러진 여학생에게 방패를 던지는 것을 본 후에 어이없어, 그 여대생을 일으켜 세우고자 달려갔는데, 
전경이 자기가 던진 방패를 다시 집어들더니, 방패 모서리를 바닥에 갈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방패를 집어들더니 저의 눈을 향해 날을 세워서 가격했습니다.... 

이게 뭔가요?

저는 대학교 다닐 때도 안 맞고 다닌 사람입니다. 고의적으로 눈을 향해 가격을 했고, 
정황을 보면, 전경부대에서 '방패를 갈아서 얼굴이나 눈을 가격하라'고 언지를 받았거나 교육을 받은게 분명합니다. 

겨우 눈 밑을 스쳐 멍들고 말았고, 주변 분들이 달려와서 그 전경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게 도와주어서 뒤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학생은 일어나 먼저 뒤로 뛰어서 피했습니다. 


두번째 경험담은, 
6월 중의 집회로 생각하는데, 토요일 오전에 광화문사거리에서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경찰들의 체포 만행입니다. 
소위 '체포전담조'는 그들이 미리 표적으로 삼은 연행자를 거리에서 연행했는데, 물론 연행은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닭장차'에 억지로 감금하고, 연행자를 '때리고 패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영상은 제가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주변의 많은 분들이 지켜봤고, 언론이나 국가인권위에 제소해야 한다는 의견도 들끓었습니다. 

해당 연행자는 닭장차 안에서 폭행을 당한 후 '말도 하지 못하고',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자신의 '신변'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뭔가요?


두번째의 사례는 경찰, 특히 '체포전담조'나 '특수기동대'의 불법적인 폭력 행사에 해당합니다. 물론 '연행'할 수 있고 '피의자 조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폭력을 쓰나요? 이게 정당화됩니까?

그리고 더 집중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첫번째 사례입니다.

전경들의 폭력성은 어제 오늘에 지적된 문제가 아닙니다.
전경들이 방패의 날을 세우고, 방패를 바닥에 갈고, 방패로 얼굴을 가격하는 것은, 10년 전에도 그랬고, 20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10년 전에도 전경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실명'을 당한 경우도 많았으며, 대학교 신입생도 전경의 방패에 눈을 맞아 실명한 경우가 저의 경우에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경들이 이렇게 폭력을 예사로 사용하는 것은, 해당 부대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교육하기 때문입니다.
즉, 불법적으로 잘못된 관행들이 전수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선임자들이 '방패를 갈아서', '얼굴을 맞춰라', 특히 '눈 부위를 가격하라', '목 주위를 가격하라'고 종용하고 전수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오는 것입니다. 


충분한 직무, 안전교육 없는 경찰권 투입은 위헌

전경들 대부분이 20대 초반입니다. 
고등학교까지 민주주의 교육을 받지만, 민주주의는 생활 속에서도 습득되고, 대학사회에서도 추가로 습득되기 때문에, 모든 전경들이 지니는 민주주의 의식이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경들에 대한 충분한 직무교육, 직무 수행에 따른 준법교육,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전경들은 '일반 시민들에 대한' 권력의 잘 훈련된 '개', '투견'일 뿐입니다. 

전경들이 집회 질서유지 현장에 나와서 울부짓는 모습을 보며, 거의 예외없는 모든 시민들이 
그들은 마치 '짐승 같다.', '훈련된 투견'들 같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군인의 경우,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 유사시라면, 총을 잘 쏘고 포탄을 잘 쏘면 칭찬받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권력에 의해 용인된 '살상'의 현장으로 군대의 목표는 그런 '폭력성'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경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집회나 시위에 나와서, 전경이 '시민들' 잘 때려잡고, 물리적인 폭력을 잘 행사하면, 
넌 참 유능한 전경이로구나...  칭찬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전경은 군인이 아닙니다. 

전경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동원된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그 '국가공권력'은 경찰권력이 전경들을 동원한 
'경찰 권력'의 권한 범위 내로 제한되는 것입니다. 

경찰이 방패로 시민 패고, 방패로 눈을 가격하고, 실명시키고, 뇌출혈 일으키고, 두개골 함몰시켜도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지금 전경들과 전경부대는 기초적인 임무에 대한 숙지나, 공권력의 행사방식과 한도에 대한 교육이 전혀 안되어 있습니다. 
비유하면 '총'을 쥐어 주었는데, 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안전수칙은 무엇이고, 왜 대부분 사용되어서는 안되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복무하고 있는 이유과 사명은 무엇인지 전혀 체득이 안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들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모르고 '울부짓는' '권력의 투견', '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그들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고, '국가' 자체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제복을 입은 자는 국가와 동일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전혀 변화가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이나 전경 집단이나 폭력을 일상사로 자행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 전의경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다. 전경차가 부셔지거나, 누군가가 쇠파이프나 죽창을 나나 동료에게 휘드루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이들의 의견은 정당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또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다른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제복'을 입었습니다. 공권력이라는 것입니다. 단순이 개인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공권력'은 '국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은 전경이 시민에게 방패로 눈을 가격하는 것은, 이명박이 직접 방패로 시민 때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공권력'이고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이웃을 죽이거나 패기에 바쁜 폭력국가에서 살고 싶습니까, 내가 사는 나라가 폭력국가였으면 좋습니까,
폭력국가가 되는데 내가 기여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제복'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국가'로써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개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갓 20대초반에 들어서서 전의경이 된 젊은이들에게 지각이 잘 안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쟁이 발발한 전투현장의 군인이 아니며,
일상 생활에서 '시민'과 접촉하는 '경찰력'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불량품' 권력은 불편함의 대상이 아니라, 회수 조치 대상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어떻게 어떤 한도와 수칙을 지켜가며 행사해야 하는지 '정당한 권력 행사'의 방식을 모르는
무지(無知)를 범하고 있다면, 그런 권력 행사는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고 용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반납되고 회수되어야 합니다. 


전경 집단이 지금과 같은 폭력을 지속한다면, 전경 집단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어떠한 집회나 시위 환경에서도, 
시민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시민사회는 '인권'과 '개념'의 사각지대인 전경과 경찰 집단에 대해서 민주화, 합리화의 사명을 안고, 
앞으로도 이들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요?

작년에 서울의 촛불집회에서 평일 하루에 새벽 아침까지 함께 했을 때,
중학교 2학년인 소년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소년이 학교에 거르게 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물론 그 학생은 아침 6시경에 집에 갔고, 등교를 했을 겁니다.

새벽 3~4시쯤에 그 학생이 저한테 와서,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요?  나라가 참 걱정되요." 라고

했습니다.

그게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마음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평생에 다시 있지는 않을거야."

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게 1년 전의 일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지금이 4.19입니까?  4.19처럼 피를 흘려야 알아먹습니까, 아니면 피를 안흘리고 있으니까 만만해 보입니까?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겁이 많아서 '피를 안흘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권력은 대리인들에게 있지 않다

그런 착오와 교만, 교언영색(色)에 빠져있는 한, 더 큰 댓가를 '권력' 스스로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은 '시민'에게 있는 것이지 '대리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역사적 현실을 망각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고, 현실로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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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후퇴를 야기하고 기본적인 시민권과 인권을 억합하며, 각종의 불합리한 정책들과 법안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이명박정권에 대한 시국선언이 최근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1년 이상 정권의 비지성적, 야만적 태도를 묵인해 왔던 교수사회나 학생회사회에서도 '노무현 서거'에 충격을 받은 듯 연이은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먼저 이러한 시국선언을 '노무현 서거' 이후에야 뒤늦게 이어가고 있는 소위 '지성(知性)' 사회에 통탄을 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으른 것이죠? 다 죽을 지경까지 간 마당에, 게으른 것이죠? 이명박정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성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머리와 지혜가 비어있기 때문 아닌가요?

여하튼, 이러한 시국선언의 흐름에 서울대교수 사회도 동참하였고, 124명의 교수분들께서 선언 서명을 하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명칭은 '서울대교수 시국선언문'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이러한 시국선언문이 당연히 서울대 전체의견이거나, 서울대교수 전체의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바보입니까, 국민들이 바보입니까...?   시민들이나 국민들이 아직도 '바보'로 보입니까?


이러한 시국선언에 대해 일부 인사들이나 이장무서울대총장은 '그것은 서울대전체의견이 아니다', '그것은 예외없는 전체의견이 아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누가 전체의견이라고 했냐구요...?

시민들은 마찬가지로 당연히, 모든 서울대교수가 양심적이거나
용기를 갖추었거나, 서울대전체가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민들, 국민들은 모든 대학교수나 대학사회, 지성사회가 '정직하거나, 지혜롭거나, 용감하거나, 부지런하거나' 그들의 할 일을 제대로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는 것이죠?

'대학', '교수' 딱지 붙이고 있다고 그들이 모두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총장'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와 동일한 논지로, 이명박정권의 정책들은 '전체 의견'이거나 '지배적 의견, 견해'가 아니라는 것이죠...
OK? Understand?

시국선언문들은 이명박정권의 반민주주의적 만행들이 결코 '전체 의견', '지배적 견해'가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시국'을 제대로 알라고 '선언'하는 것이죠?

국민들은 이명박정권의 만행들을 결코 '국민 전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관련글]
서울대교수 시국선언문 전문
중앙대교수 시국선언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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