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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09.06.12 전경, 경찰 집단폭행 충분히 가능하다
  2. 2009.05.27 판사, 검사 임용, 선거제로 전환, 선출해야 한다. 23
  3. 2009.05.27 변희재, 노무현 모욕주는 행위, 인간에 대한 매우 얕은 시각 1
  4. 2009.05.26 사지로 내몬 '빨대 검찰과 언론' _진중권
  5. 2009.05.25 민주주의에 대한 노무현 님의 메시지
  6. 2009.05.20 만장깃대, 죽창 사용은 잘못되었다. 4


6.10일 6.10항쟁 22주년 기념일을 전후하여 또다시 자행된 경찰, 전경집단의 폭력사용과 집단적인 폭행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경찰과 전경집단의 이런 야만적인 행태는 이미 작년 촛불집회 정국에서부터 수도 없이 지적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문제제기되고 있는 내용에 속합니다.

이들의 만행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들이 경찰 수칙이나, 전경 복무규정을 제대로 숙지하고나 있는 것인지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경찰과 전경집단의 생명의 위험도 초래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 사용은 계속 지적되었고 알려지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도 이런 경험을 다수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없는 전경, 경찰의 폭력 행사

저의 경우, 작년에 촛불집회에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 혹은 집회의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는 것을 목격하고, 집회자체가 전경들과의 극한 대립으로 불상사를 초래할 것이 걱정되어 많이 참여한 바 있습니다. 

집회 자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기 보다는 지켜보면서, 전경들이나 경찰들과의 불필요한 대립으로 상호간의 물리적인 폭력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도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전경들도 대부분 20대 초반의 어린 젊은 사람들이고, 이런 시국에 대한 경험은 물론, 이런 종류의 대형 집회, 시위의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고 주눅이 들어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30대를 넘어가는 세대들만 하더라도 집회시위기 사실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시위를 하더라도 전경, 경찰들과 사전에 암묵적인 타협을 하고 '보여주기' 식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사실 많았었습니다.

즉, 서로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위한 어떤 '쇼(show)'를 하지만,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서로 어느 선은 넘지않는 
암묵적인 타협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국의 집회시위의 원인, 방식 예전과 전혀 달라

그러나, 지금의 집회시위는 정권과 정국, 민주주의 전반이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그 추동세력과 집단도 어떤 '단위'나 '조직', 적어도 '대학' 사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상 '소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결사로
진지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들, '여학생'들, 젊은 '결혼여성'들이 참여자들의 다수를 차지하여 주축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전의 소위 '운동권'의 조직화되고 보여주기 식의 집회시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며, 
본질적인 분노와 정권에 대한 질책을 '시민사회', '시민', '대중' 전반이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시민혁명'의 환경입니다. 


그렇다면, 왜 '폭력'이 수반되지 않고 있느냐구요?

이미 상황은 시민혁명 수준이고, 정권은 이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지고, 대응을 내놓아야 합니다. 
시민들이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의 참 뜻'에 대한 시민의 의식이 성숙했기 때문이고, 저와 같은 사람들이 '전경, 경찰'과 '시민'들간의 불필요한 대결과 폭력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조용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폭력'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화염병', '쇠파이프'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일시적인 '집회'나 '시끄러움'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물리적인 폭력이 수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시민들은 그 만큼 배웠고, 성숙했고, 자기의 책임과 권리, 권리의 행사와 의무를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장전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 뿐이며, 그것은 '내가 누리고 있는, 누려야 할 민주주의' 안에서 정당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몸으로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로 화답하지 양보하지 않는다

이런 정국과 현실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하고, 정권과 공권력이 무수한 직접적인 경고와 조기 경고신호(alert)를 무시하고, 
여전히 막 나간다면, 이러한 '고요'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절대 양보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역사적으로 지나간 이야기로 그러했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개념필연적으로 언제나 '피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왜 '민주주의'가 무섭다고 생각합니까?

민주주의가 교과서에나 나오는 하찮은 얘기로 치부한다면, 시민들은 '민주주의'는 분명히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현실을 부정하는 권력의 교만자들에게 응당의 댓가를 선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민주주의고, 민주주의의 무서움이고, 위정자들이 항상 두려움을 느끼고, 경건하게 양심을 다하여 국정에 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권력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화된 폭력 사례

제가 작년의 촛불집회에서 노파심으로 옆에서 많이 지켜봤으나, 실제로 느낀 전경, 경찰집단의 폭력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공권력 남용과 법적인 불법에 따르는 '폭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보여 논외로 하고, 물리적폭력의 사례만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경험담을 말씀드리면,
전경들이 광화문사거리에서 집회자들을 해산하는데, 다 해산하여 뒤로 물러나는 마당에, 혼자 뒤쳐진 어린 여대생이 뛰어가다가
도로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이에 그 여학생을 좇던 전경이 그 여학생을 향해 방패를 날렸습니다. 방패로 찍은 것이 아니라, 방패를 아예 그 여학생한테 날려서, 그 여학생의 머리를 살짝 빗나가서 맞았습니다. 고의적으로 여학생의 머리를 향해 방패를 던져서 날렸습니다. 
간신히 비켜가서 망정이지 정면으로 맞았으면 최소한 뇌진탕에 걸리거나 했을 것입니다. 

혼자 쓰러진 여학생에게 방패를 던지는 것을 본 후에 어이없어, 그 여대생을 일으켜 세우고자 달려갔는데, 
전경이 자기가 던진 방패를 다시 집어들더니, 방패 모서리를 바닥에 갈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방패를 집어들더니 저의 눈을 향해 날을 세워서 가격했습니다.... 

이게 뭔가요?

저는 대학교 다닐 때도 안 맞고 다닌 사람입니다. 고의적으로 눈을 향해 가격을 했고, 
정황을 보면, 전경부대에서 '방패를 갈아서 얼굴이나 눈을 가격하라'고 언지를 받았거나 교육을 받은게 분명합니다. 

겨우 눈 밑을 스쳐 멍들고 말았고, 주변 분들이 달려와서 그 전경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게 도와주어서 뒤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학생은 일어나 먼저 뒤로 뛰어서 피했습니다. 


두번째 경험담은, 
6월 중의 집회로 생각하는데, 토요일 오전에 광화문사거리에서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경찰들의 체포 만행입니다. 
소위 '체포전담조'는 그들이 미리 표적으로 삼은 연행자를 거리에서 연행했는데, 물론 연행은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닭장차'에 억지로 감금하고, 연행자를 '때리고 패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영상은 제가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주변의 많은 분들이 지켜봤고, 언론이나 국가인권위에 제소해야 한다는 의견도 들끓었습니다. 

해당 연행자는 닭장차 안에서 폭행을 당한 후 '말도 하지 못하고',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자신의 '신변'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뭔가요?


두번째의 사례는 경찰, 특히 '체포전담조'나 '특수기동대'의 불법적인 폭력 행사에 해당합니다. 물론 '연행'할 수 있고 '피의자 조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폭력을 쓰나요? 이게 정당화됩니까?

그리고 더 집중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첫번째 사례입니다.

전경들의 폭력성은 어제 오늘에 지적된 문제가 아닙니다.
전경들이 방패의 날을 세우고, 방패를 바닥에 갈고, 방패로 얼굴을 가격하는 것은, 10년 전에도 그랬고, 20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10년 전에도 전경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실명'을 당한 경우도 많았으며, 대학교 신입생도 전경의 방패에 눈을 맞아 실명한 경우가 저의 경우에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경들이 이렇게 폭력을 예사로 사용하는 것은, 해당 부대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교육하기 때문입니다.
즉, 불법적으로 잘못된 관행들이 전수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선임자들이 '방패를 갈아서', '얼굴을 맞춰라', 특히 '눈 부위를 가격하라', '목 주위를 가격하라'고 종용하고 전수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오는 것입니다. 


충분한 직무, 안전교육 없는 경찰권 투입은 위헌

전경들 대부분이 20대 초반입니다. 
고등학교까지 민주주의 교육을 받지만, 민주주의는 생활 속에서도 습득되고, 대학사회에서도 추가로 습득되기 때문에, 모든 전경들이 지니는 민주주의 의식이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경들에 대한 충분한 직무교육, 직무 수행에 따른 준법교육,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전경들은 '일반 시민들에 대한' 권력의 잘 훈련된 '개', '투견'일 뿐입니다. 

전경들이 집회 질서유지 현장에 나와서 울부짓는 모습을 보며, 거의 예외없는 모든 시민들이 
그들은 마치 '짐승 같다.', '훈련된 투견'들 같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군인의 경우,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 유사시라면, 총을 잘 쏘고 포탄을 잘 쏘면 칭찬받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권력에 의해 용인된 '살상'의 현장으로 군대의 목표는 그런 '폭력성'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경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집회나 시위에 나와서, 전경이 '시민들' 잘 때려잡고, 물리적인 폭력을 잘 행사하면, 
넌 참 유능한 전경이로구나...  칭찬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전경은 군인이 아닙니다. 

전경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동원된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그 '국가공권력'은 경찰권력이 전경들을 동원한 
'경찰 권력'의 권한 범위 내로 제한되는 것입니다. 

경찰이 방패로 시민 패고, 방패로 눈을 가격하고, 실명시키고, 뇌출혈 일으키고, 두개골 함몰시켜도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지금 전경들과 전경부대는 기초적인 임무에 대한 숙지나, 공권력의 행사방식과 한도에 대한 교육이 전혀 안되어 있습니다. 
비유하면 '총'을 쥐어 주었는데, 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안전수칙은 무엇이고, 왜 대부분 사용되어서는 안되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복무하고 있는 이유과 사명은 무엇인지 전혀 체득이 안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들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모르고 '울부짓는' '권력의 투견', '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그들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고, '국가' 자체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제복을 입은 자는 국가와 동일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전혀 변화가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이나 전경 집단이나 폭력을 일상사로 자행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 전의경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다. 전경차가 부셔지거나, 누군가가 쇠파이프나 죽창을 나나 동료에게 휘드루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이들의 의견은 정당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또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다른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제복'을 입었습니다. 공권력이라는 것입니다. 단순이 개인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공권력'은 '국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은 전경이 시민에게 방패로 눈을 가격하는 것은, 이명박이 직접 방패로 시민 때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공권력'이고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이웃을 죽이거나 패기에 바쁜 폭력국가에서 살고 싶습니까, 내가 사는 나라가 폭력국가였으면 좋습니까,
폭력국가가 되는데 내가 기여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제복'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국가'로써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개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갓 20대초반에 들어서서 전의경이 된 젊은이들에게 지각이 잘 안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쟁이 발발한 전투현장의 군인이 아니며,
일상 생활에서 '시민'과 접촉하는 '경찰력'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불량품' 권력은 불편함의 대상이 아니라, 회수 조치 대상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어떻게 어떤 한도와 수칙을 지켜가며 행사해야 하는지 '정당한 권력 행사'의 방식을 모르는
무지(無知)를 범하고 있다면, 그런 권력 행사는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고 용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반납되고 회수되어야 합니다. 


전경 집단이 지금과 같은 폭력을 지속한다면, 전경 집단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어떠한 집회나 시위 환경에서도, 
시민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시민사회는 '인권'과 '개념'의 사각지대인 전경과 경찰 집단에 대해서 민주화, 합리화의 사명을 안고, 
앞으로도 이들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요?

작년에 서울의 촛불집회에서 평일 하루에 새벽 아침까지 함께 했을 때,
중학교 2학년인 소년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소년이 학교에 거르게 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물론 그 학생은 아침 6시경에 집에 갔고, 등교를 했을 겁니다.

새벽 3~4시쯤에 그 학생이 저한테 와서,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요?  나라가 참 걱정되요." 라고

했습니다.

그게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마음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평생에 다시 있지는 않을거야."

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게 1년 전의 일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지금이 4.19입니까?  4.19처럼 피를 흘려야 알아먹습니까, 아니면 피를 안흘리고 있으니까 만만해 보입니까?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겁이 많아서 '피를 안흘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권력은 대리인들에게 있지 않다

그런 착오와 교만, 교언영색(色)에 빠져있는 한, 더 큰 댓가를 '권력' 스스로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은 '시민'에게 있는 것이지 '대리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역사적 현실을 망각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고, 현실로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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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촛불정국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국가권력이 자행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들과 제도적 한계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본인과 같은 경우, 당시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목격한 후, 촛불정국 이후에 우리가 개선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 여러 사례들을 지적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절대화된 국가권력기구, 행정기구, 사법기구에 대한 국민의 직접적인 통제와 감시 기능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경찰의 자의적인 공권력 행사를 목격하면서 '아... 경찰이 이러면 안되겠구나...', '경찰이 오로지 대통령이라는 행정권력 밑에 절대적으로 복속해 있으면 안되겠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이는 경찰뿐만이 아니라 검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 기반한 의지는 아직 인식 수준에서만 머물렀지만,
최근까지의 진행경과를 보면 더 이상 묵인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로, 이제 제도적 개편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국가공권력 국민의 공식적 통제 필요 _검찰기구는 이제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

경찰, 검찰, 법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고, 되어서도 안되고, 특정권력집단의 권력의 시녀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성과, 87년 민주화투쟁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핵심 민생집단의 '권력화', '권력시녀화' 경향성은 개선된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에서도 분명하게 문제점으로 드러났고, 결국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로 귀결되었고, 앞으로도 개선의 기미가 쉽게 발견될 것 같지 않은 이 상황들을 본질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검찰'이 자성하는 계기로 삼으라고 충고하고, 여러 글을 올리고 계십니다.
그냥 자성만 하라고 하면 될까요?


경찰, 검찰, 법원이 행정부에 과도하게 복속된 구조로는 그러한 형평성과 정의롭고 합리적인 법의 집행, 국민을 위한 사법집행은 요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경찰, 검찰이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정권편향적인 처사들은 분노를 넘어 심각한 지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게 단순히 정권이 바뀌거나, 여론의 질타를 맞으면 개선될까요?


2. 현행 판사, 검사 임용 구조 합리성 떨어지는 국가독재, 후진국적 산물

지금처럼 사회경험이 적고, 인성수련 기간이 적은 학생들을 단순히 '사법시험'이나 '관련시험'을 쳐서 '판사'나 '검사'에 배치하는 나라는 상당히 후진적인 것에 속합니다. 이는 예전에 개발독재, 국가행정일원화 시대에나 통했던 것입니다.

30살도 안된 어린 학생이 판사 자리에서 법을 심판하고 있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요?
행정권력과 정권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형평성을 잃어버린 검사권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3. 미국 및 주요 선진국 판사, 검사, 주요 국가공권력 선거로 선출

미국의 경우, 판검사 임용은 엄연히 '선거제', '선출제'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대학(로스쿨)을 졸업하면 전부 변호사가 될 뿐이고, 변호사로 5년 이상 사회경험을 가진 뒤에 그 자격과 사회활동을 검증받은 후에야, 판사나 검사로 선출될 수 있는 피선거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한국처럼 시험만 봐서, 판사, 검사 배치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선거제는 권력을 국민에게, 지역민에게 직접 귀속시킴으로써, 판사나 검사의 사명감을 높이고, 민주적 정당성과 형평성에 기여하며,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균형있는 법의 집행을 도모할 수 있게 합니다.

지금처럼 사리영달을 위해, 권력의 '도구', '사녀'로 전락하는 폐해, 악습을 사전에 제도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선거제, 선출제는 그 능력이나 정당한 활동을 계속 검증받아야 하므로, 국민 스스로에게도 월등히 좋은 것입니다.


4. 고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는, 검찰, 법원, 경찰 등 주요 공권력 기관의 제도적 민주화 과제 노출


고 노무현 전대통령께서 권력과 검찰의 무리한 압박으로 서거하였지만, 이러한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서거의 교훈이 일시적인 슬픔이 아니라, 영원한 교훈과 개선으로 남기 위해서는,

먼저 판사, 검사 선출부터 선거제로 바꿔야 합니다.

이는 경찰 주요 지도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총장을 왜 대통령이 임명해야 합니까?  선출해야 합니다.
적어도 경찰을 지휘하는 검찰의 검찰총장부터 즉시 선거로 선출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교육감 선출을 선거제로 하고 있습니다.


5. 검찰, 법원, 경찰주요직 선거제는 국민적 정당성과 권력의 다원화, 상호감시 증진

주요 권력집단을 선거제로 선출하는 것은,
주요 공권력 기관들이 '일방적 권력 편향성'으로 흐르지 않고, 형평성있고 정의로운 법의 집행과 심사를 하여, 정당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지름길이고, 이들이 국민의 복속으로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공권력 권력기구들의 권력집권 구조가 다원화되어, 상호 견제를 가능케 합니다.


지금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교훈은 판사, 검사를 이제 선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선출은 자격자 중에서 선출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검사는 변호사 자격자 중에서 선출하는 것입니다.)


6. 이러한 선거제, 선출제는 현행 헌법 개정없이 즉시 도입, 시행 가능

물론 대법관은 정치적으로 고려되고, 헌법에 임기가 보장되지만,

대법관이 아닌 평판사, 판사로의 최초 진입은 선거로 선출하면 됩니다.
또한, 현행 헌법은 판사의 임명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현행 헌법에서 당연히 선출제가 가능합니다.
검사나 경찰주요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검찰총장, 경찰총장 부터 즉시 선거제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권력과 공권력의 제1기준은 '국민'이고 국민의 권익 증대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권력', '공권력'이어야 하며,
국민의 통제를 받는 '공권력'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주요 권력의 민주화이고, 그 시작은 판사, 검사를 이제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표현을 모아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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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장례절차, 국민장과 관련하여 고인(故人)에 대해 모욕을 주고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매우 얕은 시각을 드러내고 있어서 안타깝다. 

인간의 큰 고통 중의 하나는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특히 구조화된 폭력인 권력이 그 강압력를 악용해서 인간을 억압할 때 얼마나 큰 인간적인 고통과 폐해가 따르는지는 이미 30년 이래의 한국 현대사만 보더라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변희재씨가 논란을 일으켰으므로, 물론 그의 주장을 들여다보며, 하나씩 살펴본다. 


변희재씨의 첫째 주장을 보면,

"국민의 한 명으로서,내가 번 돈으로 세금을 국가에 내는 납세자의 한 사람으로서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국민세금은 단 돈 1원도 투입돼서는 안 된다."


-- 세금을 내는 행위와 세금을 집행하는 행위는 엄연히 구분된다. '납세의 의무'는 국민의 기본적인 의무이고, 전체 '국가재정'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입법권력(국회, 법)과 행정권력(정부, 행정력)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며, 사법권력(사법부)의 감시를 받을 뿐이다. 여론은 물론 참고사항이 되겠지만, "국가재정"의 집행은 제정법에 귀속되므로, 법이 우선이다.

-- 묻고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가 법에 위반되는가? 고인의 장례는 법에 따라 집행되는 것이다.

-- '재정'의 집행은 국회나 행정권력에 따라 '정치적'으로 배분되기 때문에, 물론 당연히 개별 '납세자' 입장에서 보면 마음에 안드는 흐름도 있을 수 있다. 어떤 '납세자'는 자신이 내는 세금이 '국방비'나 '무기를 사는 비용'으로 절대로 쓰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국방비를 쓰는게 아예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정당한가?

'국가재정'은 법에 따라 집행되고 있고, 이러한 '법의 집행'은 국민의 합치된 컨센서스(consensus), 일반의사에 따르고 있다고 일단 봐야 한다. 

따라서, 변희재씨의 첫째 주장은 '납세의 의무', '국가재정'의 집행에 대한 질이 떨어지는 개인적 옹아리에 불과하다.


변희재씨의 둘째 주장을 보면,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하여 "당신은 왜 죽음을 선택했냐?"고 따지고 있다.

-- 변희재씨에게 묻고싶다. 이미 죽은 사람한테 "너 왜 죽었냐?"고 따져서 뭐하나?
    사후(事後)에 이미 돌아가신 사람보고, 너 왜 죽었냐고 수사기관이 캐듯 따져서 뭐하느냔 말이다. 무덤에 데고 조서라도 받고 싶은가?   안 돌아가셨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누가 그걸 모르나?
    이미 돌아가셨고, 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누가 '죽었으니까, 참 잘했네, 참 잘한 선택이네'라고 칭찬이라도 했는가? 안타까운 것이다. 
    살아계실 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꼭 살아가시라고 응원해보지 그랬냐고 반문해 보고 싶다.
    살아계실 때도 '자살하라'고 종용한 저 정신나간 김동길씨한테도 한마디 하시지 그랬냐고 '이미 일이 다 터진 마당에' 변희재씨에게 '따져보고' 싶다. 왜 변희재씨는 노무현씨를 살리지 못했는지 '따져보고' 싶다는 것이다. 
    살리지도 못했으면서, 뭔 사후에 본인에게 삿대질이냐 이 말이다.   
      

변희재씨의 셋째 주장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하는 의무를 저버렸다"고 하고 있는데,

--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은 것인가? 
    어떤 인간도 타인이 보기에는 완벽할 수는 없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지,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지 살아왔는지는, 오직 그의 양심과 양심에 따르는 고귀한 삶이 첫번째 기준, 준거가 된다. 
    노무현씨는 제3자가 보기에도 자신의 인간적인 양심과 소신을 지켜왔고,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가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지 않았다는 어떤 증명도 없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러한 증명이 있더라도, 한 개인의 삶을 타인이 일방적으로 제단해야할 어떤 권한도 없다.


변희재씨는 전직대통령이 "그 동안 수고했으니 놀고 먹으면 안되고",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은 전직대통령의 의무는 "그 명이 다할 때까지 오래살면서 학자들의 연구소재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괘변을 늘어놓고 있다. 

-- 전직대통령의 '예우'에 관한 법률은 말 그대로 '예우"를 담고 있는 것이다. 국가라는 전체공동체를 이끌어온 노고에 대해서 '대우'해 주는 것이다. 또 이런 '예우'는 연금의 성격도 지닌다. 연금이 뭔가? 은퇴했으니 놀고 먹으라는 소리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놀고 먹으라는 소리라는 것이다. 

-- 또한 '그 명이 다할때까지 오래살면서 학자들의 연구소재가 되라'고 했다. 노무현씨가 무슨 '실험실의 표본'이라도 되는가? 학계에서 노무현씨를 연구하는 것은 학계 자신의 몫이거나, 학계 자신의 학문적 자유의 선택이지, 노무현씨의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고, 노무현씨가 '실험실의 표본'이 되어야할 의무도 없다는 것이다.

-- 물론 전직대통령으로 '사회적 의무'는 있다. 현직자들이 대우를 해준다면 현직에서 수행할 수 있는 명예직의 권한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우를 해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전임자에게 죽음을 끈질기게 강요한 현실이 과연 '예우'인가?


변희재씨의 다섯째 주장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자신의 패거리의 안위만 걱정했던 조폭의 보스", "자신의 측근을 살라기 위해 장렬히 몸을 던지는 조폭의 보스"와 같은 행위라고 고인을 욕되게 하고, 폄하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먼저 유족이나 고인의 명예관리 당사자들께서 어떤 법적인 조치도 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폭'인가?  
    아니면, 조폭과 비슷하다는 것인가, 조폭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인가?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폭 두목"이어서 슬퍼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조폭 패밀리"라는 것인가?
    고인(故人)은 물론, 고인이 되시지 않았더라도, 본인을 두번 세번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변희재씨는, '인간'이나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특히, 개념적으로나 혹은 자신이 아닌 타인(他人)의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자연적 삶을 마감하지 못하고, 사고나 죽음의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직접 되보지는 안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헤아일 뿐이다. 
      

죽음을 강요한 정황이나,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의 본질적 고통을 느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염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지경에게까지 오게한 권력의 부당함과 일부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고인을 희생시켰는지는 앞으로도 찬찬히 봐야 한다.


그러나,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면, 노무현은 '인간 노무현'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가 처했던 인생의 시점으로 보면, '촌부(村夫)'로 죽은 것이고, '아버지'로서 죽은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말년에 가고자 했던 길이고, 그가 실제로 살고 있었던 인생의 모습이었다.
구조화된 권력, 부당한 권력이 '촌부'로, '아버지'로 이미 돌아간 자신을 부정하라 하고, 자신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 자기결정, 인격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다. 권력이라는 폭력의 이름으로. 

우리가, 봉하마을로 돌아간 노무현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촌부로 돌아가 여느 아버지들처럼 평안하게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적어도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것은 평화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평화이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의 평화이기도 했다.
이 평화는 깨졌다. 노무현 당신의 평화는 물론 죽음이라는 영원한 안식을 통해 먼저 지켜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평화는 깨졌고, 이런 평화를 깬 당사자들은 조만간 그 죄값을 치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아버지 다음으로 중요한 우리의 '아버지', 나이 들어서 이제 여생을 보내셔야 할 '촌부가 되신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이기 이전에, 자연으로 돌아간 우리 모두의 '아버지', '어른'이었다. 그래서 더 슬픈 것이다.


변희재씨는 유족들과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인간의 본질적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가 동시대 사람들과 앞으로 올 후대들에게 '삶'에 대해서 얘기할 수는 있어도, 고인이 되신 노무현씨를 폄하할 권한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변희재씨의 논지는 별로 주목할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회자되고 논란이 되므로 한말씀 남겨드리는 것이다. 당신께서는 조용히 앉아, 김현승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조용히 음독해 볼 것을 권장한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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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9년 5월 25일 진중권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상황에 대해서 냉정하게 제시하고 있고, 잘 쓰여진 글이어서 올립니다. 출처는 경향신문 기고 기사 입니다. (원기사 링크 클릭)

사지로 내몬 '빨대 검찰과 언론' _진중권

2007년 12월28일, 당시 이명박 당선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켜졌다. 노 전 대통령이 몸을 던진 지난 23일, 이 대통령은 비서관들에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고 긴급 지시했다. 드디어 전임자를 잘 모셔도 될 때가 왔다고 판단한 걸까? 이 사건을 보며 머릿속으로 고대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남긴 기록이 떠올랐다.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가 이집트의 왕 사메트니우스를 붙잡았을 때, 그는 이 포로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캄비세스는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는 거리에 사메트니우스를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사메트니우스는 자신의 딸이 물동이를 인 하녀의 모습으로 제 앞을 지나는 것을 봐야 했다. 모든 이집트인이 이를 보고 슬퍼했지만 사메트니우스만은 눈을 땅에 떨어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 처형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 함께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로행렬에서 자신의 하인 가운데 하나를 보는 순간, 그는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표했다.”

세세한 차이만 있을 뿐, 우리가 본 것은 수천년 묵은 이 고대의 관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정치하는 나라라서 그럴까?

임기를 마친 것은 패전이 되었고, 퇴임한 대통령은 포로 취급을 받았다. 포로가 된 대통령은 먼저 측근들이 줄줄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봐야 했다. 승자들은 그의 눈앞에 포박한 아내를 데려다 놓고 실실 웃으며 ‘자기를 구하려고 아내를 버리느냐’고 모욕을 퍼부었다. 법적으로 싸워보겠다던 그의 가냘픈 의지도 행렬 속에서 마침내 자기의 아들과 딸을 보는 순간 꺾이고 말았다.

촛불정국으로 현직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을 헤매고 전직 대통령의 인기가 날로 높아만 가고, 친노가 재결집한다는 소문이 떠돌던 지난해 여름. 수사는 연임을 앞둔 전 국세청장이 특별세무조사로 4개월 동안 태광실업을 털어 얻어낸 정보를 대통령에게 직보함으로써 시작됐다. 세무조사 앞에 붙은 ‘특별’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뜻을 갖는다. 검찰은 인원을 두 배로 늘려 전직 대통령 주변을 몇 달에 걸쳐 먼지 털듯이 털었다. 국정원에서는 때맞춰 억대의 시계 얘기를 흘렸다. 금속탐지기를 갖고 봉하마을로 쳐들어가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면 단숨에 할 일. 하지만 검찰은 그동안 이른바 ‘빨대’를 동원한 교묘한 언론 플레이만 해왔다. 검찰은 고슴도치인가? 온몸에 빨대를 꽂은 모양으로 내용물을 줄줄 흘리고 다녔다. 이를 보다 못한 누군가가 검찰청에 빨대 한 상자를 택배로 보내는 퍼포먼스를 했다. 고양이가 참새를 잡아놓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듯이, 수사를 끝내놓고 구속 카드와 불구속 카드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를 무려 한 달. 마침내 참혹한 사태가 벌어어자 이제 와서 낯 두껍게 “원래 불구속 기소하려고 했다”고 인간미를 자랑한다.

검찰-빨대-언론은 혐의를 사실로 확정했다.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판결은 법정 밖에서 내려졌다. 보도를 보니 “확실한 물증을 수사팀에서 확보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그래서 주변을 괴롭히며 압박하고 들어가 강제로 자백을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검찰은 무리한 수사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를 해 검찰에서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자. 그 경우 더 큰 문제가 남는다. 증거는 언론이 아니라 법정을 위한 것인데, 왜 언론 플레이로 전직 대통령을 망신주는 정치적 기동을 해야 했는가?

“미안해하지 말라.” 권양숙 여사를 향해 한 말인 것 같다. 가족이 돈을 받았어도, 어차피 도덕적 책임은 대통령 자신에게 돌아간다. 물론 도덕적 책임과 법적 책임은 엄연히 다르나, 평소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던 자신이 이제 와서 법과 도덕은 다르다며 변명을 하는 것 자체가 구차한 일. 그렇다고 변호를 안 할 수도 없는 것이, 그 일에 당신 개인만이 아니라 개혁세력 전체의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변호하면 검찰의 올가미가 주변과 가족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옥죄여 들어온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향에서조차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그 분은 몸을 날려 정치 없는 세상으로 날아가셨다. 이것을 ‘서거’가 아니라 ‘자살’이라 불러야 한단다. 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 불러야 한다.

커다란 슬픔과 뜨거운 분노로 그 분을 보낸다. “원망하지 말라.” 그래, 우리는 저들을 용서하자. 그러나 결코 잊지는 말자.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출처, 경향신문 기고문(2009.05.25)


주 후반 즈음에 저도 현재 사태에 대해서 글을 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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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되신 노무현 님께서는 우리 곁을 먼저 떠나 이제 자유의 몸이 되셨습니다. 
많이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노무현 님께서는 민주주의 관한 소중한 말씀을 최근에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멀게 온 것과 같은 당신의 소중한 말씀을 여기에 다시 남겨 봅니다.
이 글은 민주주의에 관한 당신의 소고를 당신의 퇴임 직전인 1년전에 '국민'께 직접 밝히신 글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메시지 



  시민주권시대를 위하여 

  깨어있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이 역사발전의 원동력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한국의 민주주의는 투쟁의 시대를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20년간 청산과 개혁을 통하여 적어도 형식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공고히 만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절반의 민주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숙한 민주주의, 내실 있는 민주주의를 할 때입니다.

 

지배로부터의 자유 - 민주주의 귀결은 진보의 사상


민주주의에는 기본적으로 진보주의 사상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대립적인 개념이라고 봐왔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등한 사회만이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로부터 자유입니까? 사람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와 속박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 중에서도 지배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을 얘기할 때는 평등이 근본입니다. 연대와 사회정의를 이상으로 하는 진보주의는 민주주의 안에 내재해 있는 가치입니다.

민주주의 사상이 성립한 이래로 사람들은 꾸준히 지배질서를 해체해왔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진전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는 자유를 제약하는 많은 환경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지배질서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시장에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시장이라는 제도 속에서 보다 많은 생산을 해낼 수 있고, 보다 많은 효율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산성을 높이고 보다 높은 수준의 번영을 누립니다. 이 제도는 효용성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시장 안에서 많은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투명하고 공정하지 않으면 시장 내부에서 지배질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시장의 낙오자가 지배받지 않는 시스템 필요


시장에서 성공한 사람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 지배와 예속이라는 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에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고 하는 사상은 새로운 지배질서를 계속 강화시키는 사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시장 절대주의, 시장 지상주의와 맞서나가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핵심이 민주주의입니다.

시장은 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체제는 반드시 낙오자를 만들게 돼있습니다. 시장 경제의 토대 위에서 설사 승자라 할지라도 남을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 특히 비인간적으로 가혹하게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 패자에게도 예속되지 않게 하는 것, 미천하게 지배받지 않게 하는 또 다른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정치입니다.

 

시장권력과 언론의 독주가 민주주의 위기 불러


정치는 가치를 추구하지만 시장은 이익을 추구합니다. 시장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것, 패자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은 정치원리이지 시장원리가 아닙니다. 시장이 그 같은 공존의 틀 속에서 공정하게 움직이도록 관리하고 보완하는 일은 정치의 몫입니다. 가치가 아닌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정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나고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정치권력은 분산돼 나가는 반면 시장권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정치가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적자생존의 논리로 움직이는 시장이 사회를 지배할 때 가치의 위기가 발생합니다.

언론도 시장권력과 결탁하거나 더 나아가 스스로 시장권력이 되고 있습니다. 정보 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언론이 시장과 결탁해 시장의 논리를 강화하고 시장자본에 봉사하면 약자를 배려하고 연대와 균형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설 땅이 없습니다.

 

이제 시민이 권력의 주체세력으로 제대로 서야


제가 지금은 절반의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올 만큼 다 온 것이 아닙니다. 시장의 지배를 얼마나 제어해나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시장의 경쟁은 수용하되 그것이 지배의 구조가 되지 않게 제어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여러 권력 간의 관계가 제대로 편성된 사회로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 일을 누가 합니까. 바로 시민이 하는 것입니다. 시장 안에도 시민이 있고 시장 바깥에도 시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해 나가는, 끊임없이 지배질서와 지배사상에 도전해 나가는 사람들이 저는 시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주권자로서, 권력의 주체세력으로서 시민이 제대로 서야 합니다.

흔히 정치인들은 권력을 정점으로 사고합니다. 정치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많은 시민들이 ‘권력을 가졌으면서 왜 할 일을 다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정치권력은 하나의 권력일 뿐이고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은 바로 시민들의 머릿속에 있습니다.

  

각성하는 시민의 힘이 민주주의 보루이자 미래


시민의 각성과 변화, 이것이 궁극적인 답입니다. 시민들의 각성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시민들이 시장과 정치의 관계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정치로 하여금 시장의 부조리를 제어해나가게 하고 언론에 대해서도 소비자의 선택을 통해 올바른 언론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권자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와 이해관계가 정책이나 노선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따져보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정치적 선택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시민주권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합니다. 깨어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이 바로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적절한 민주주의 형태를 저는 진보적 시민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인간다운 삶이라는 가치의 실현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독선과 부패의 역사, 분열의 역사, 패배의 역사, 굴욕의 역사 여기에서부터 비롯돼 왔던 패배주의와 기회주의 문화를 오늘날 민주주의 시민사회, 민주주의 시민문화로 변화시켜나가야 합니다. 물려받은 역사의 낡은 잔재들을 해소해나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시민적 주체세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시민과 함께 진보적 시민민주주의의 길 갈 것


정치지도자나 대통령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결국 그 시대를 살고 역사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꿔내지 못하면, 역사의 진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통령 하나 뽑아놓고 그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항상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력으로 무엇을 해내고자 한다면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 가치와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시민, 지도자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시민, 나아가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는 시민이 많아져야 합니다.

저도 다시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특별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의 주권자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가 완결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민주주의가 더 발전해야 할 많은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길에는 모든 시민들이 동행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 지향이 뚜렷하고 각성이 있는 사람은 그 길로 동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저는 계속 가는 것입니다.

제 당대에 진보적 시민민주주의의 완성을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누려야 할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우리는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면 한 발 한 발 역사가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주권시대를 열어나갑시다.

시민주권시대를 위하여
깨어있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이 역사발전의 원동력

  등록일 : 2008-02-20

이 글은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 민주주의에 관한 주요 발언을 정리한 글입니다.

주요 출처 : 참여정부평가포럼 월례강연(07.6.2) 원광대 특강(07.6.8) 2007 벤처기업 대상 특강(07.10.18) KTV 인터뷰(07.11.11) 출입기자단 송년만찬(07.12.26) 노사모 초청 산행 (08.1.13)

   등록일 : 2008-02-20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퇴임직전 청와대 홈페이지에 직접 남긴 노무현님의 '민주주의'에 관한 소고입니다.

(원출처 청와대 링크는 정권교체 이후 폐쇄/ 교체되었습니다. http://www.president.go.kr/cwd/kr/index.php)





[헌정음악]
루시드폴(Lucid Fall) 물이 되는 꿈

Toto  I'll be ove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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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집회에서 만장깃대 (소위 '죽창')가 사용되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집회자들이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크든 적든 '힘'을 보여주고, '의사'를 표현하여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표시하려는 아주 정상적인 행위, 말 그대로 '데모'입니다.

민주사회에서 데모(demo)는 매우 흔하고 일상적인 것이며,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집회들이 일부 폭력적으로 진행되는 원인에는
경찰의 무리한 집회봉쇄나 경직된 집회대응에서 초래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고, 작년 촛불집회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이에 대한 반성없이,
여전히 그래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회자들이 시위를 하고 집회를 하는 것, 소위 '데모'를 하는 것은, 답답해서 나온 것이고,
그런 정치사회적 의사를 '표출'하려고 나온 것인데,

이런 형태는 대체로 '운집', '집회', '행진', '해산'으로 마무리 됩니다.

집회자들은 운집과 집회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가 결집되고 표현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적어도 최소한의 행진을 통해 그러한 의사들이 알려지고 있고, 표현이 보장되고 있다는 심리적 위안을 받게 됩니다.
즉, 집회에서 카타르시스적 해소가 나타나게 됩니다.

'행진'의 의사가 있는 집회군중에게 '행진'을 과도하게 막으면, 당연히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의사가 탄압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집회를 통한 카타르시스 해소가 안되기 때문에, 오히려 '집회'가 해소나 알림의 장이 못하고, '분노'나 '폭발'의 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즉, 집회에 모인 군중들은 최소한 '행진'은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행진'을 적정선에서 보장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경찰의 집회대응을 보면, 여전히 자신들에게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집회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하며, 집회군중을 자극하여, 오히려 폭력적으로 돌변하게 하는 경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내비두고, 행진하고 싶으면, 적적성에서 타협해서 평화적으로 행진하도록 유도하면 됩니다.  


이전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운집', '집회' 조차 사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행진'에 대해서도 좋은 시선을 보냈을리 없습니다. 

지금은 여전히 한계가 많지만, '운집', '집회' 자체에 대해서는 용인해 주면서, '행진'에 대해서는 여전히 구태적인 대응과 시선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작년 이 맘때의 촛불집회를 생각하면, 소위 '폭력적'이었다고 보이는 사건들의 원인은 집회참가자들의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행진'의 경로와 의사를 차단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항의표시로 발생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평화적인 집회문화를 위해서도, 상식적으로 따라오는 '행진'의 평화적인 보장,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필요가 있고, '행진'을 과도하게 불법시하는 경찰의 태도나 대응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집회참가자들은 어떤가요?

집회참가자들은 정상적으로 데모(demo)하러 나왔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집회 자체나 행진이 좌절되면 소위 '열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가고, 자유주의 국가여야 하며, 실질적으로 집단과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집회에 대해 경고하거나, 자극하거나, 행진을 봉쇄하는 것을 '억압'이나 '탄압'이라고 느낄 수 있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심리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만장깃대나 죽창, 기타 위험물질의 사용이 정당합니까?

집회자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정권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소위 '전경들'에 불과합니다.
전경이 누굽니까? 대체로 20대 초반의 군복무 대신해서 전경 입대하여,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는 어린 청춘들이고, 친구이고, 조카이고, 옆집 총각이고, 아들이고, 손자라는 것입니다. 전경이 아니고 경찰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한테 만장깃대나 죽창을 겨눈들 무슨 소용이 있고, 어떤 의미가 있고, 무슨 정당성이 있습니까?

소위 집회나 행진이 차단되어서 열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같이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집회나 행진을 일부 방해하면, 만장깃대나 죽창 사용은 정당화됩니까?

집회를 아무리 열심히 하고, 데모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집회나 데모는 수단이나 열기의 표출에 불과하고, 집회나 데모가 목표로 하는 환경과 변화는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을 철폐하자고 하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집회나 데모는 일시적인 수단이거나 열기의 표출에 불과하지, 집회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비정규직이 철폐'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정규직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비정규직 철폐 법안'을 통과시키면 됩니다. 즉, 그런 국회의원 밀어주고, 합리적으로 토론해서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사회적 합의와 기반, 의견과 행동을 모아나가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게 만장깃대, 죽창 사용으로 해결됩니까?

만장깃대, 죽창 사용으로 모든게 해결되고, 일시에 해결되면 너나 나나 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해결됩니까?  서로에게 상처만 내고 득될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만장깃대, 죽창 사용이 겨누고 있는 것은 '옆집 총각'들일 뿐입니다.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집회나 행진이 방해받고 있다면, 그 당시에는 열 받을 수 있지만, 사후에 정식으로 문제제기 하십시오.
그런 사례들이 모아질 수록, 국민들은 그런 비타협적이고 관용이 없는 행정력과 권력을 멀리하고 배척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비관용이나 불법, 형평성 없는 집행을 일삼고 쌓아가는 쪽이 더 불리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만사는 정상적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필귀정'이라는 것입니다.

경찰이든, 집회집단이든, 어떤 식으로든, 폭력적인 상황으로는 종국의 '승리'와 '호응'을 이루어낼 수는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떳떳한데 굳이 '폭력'을 쓸 필요도 '강요'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순히 여론을 위해서만 그렇다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런 사례가 일시적인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적 합의나 성숙도 없이 상호 구태를 반복하고 있어서, 여기저기 부상자나 가치 증진이 없는 상처만 내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이런 불합리한 집회시위문화 및 대응은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정정당당한 집회, 시위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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