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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드라마 '추노'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화려한 관심을 받으며 출발했던 '언년이'(이다해 분)도 극의 종결과 함께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다해는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주어진 역할 역기를 90% 이상 무난하게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언년이' 캐릭터 자체는 '어정쩡한' 설정으로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그래서 작가가 '언년이'(김혜원)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형상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인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언년이'를 연기하는 이다해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그럴까?
'추노'에 대한 전반적인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추노의 '언년이'는 왜 초반부터 설득력없게 그려지고 있을까?
추노에 등장한 '언년이'의 행적을 초반부터 결말까지 쭉 따라가보면 아래와 같다.
[언년이의 행적 경로]
1. '노비'로 살던 대길이의 집을 오빠와 함께 도망쳐 떠난다.
2. 도망친 오빠와 함께 양반 행세를 하면서 산다.
3. 오빠가 제3자와 결혼시키려고 하자, '자신의 인생'을 찾아 '가출'하여 집을 나선다.
4. 정처없이 유랑하다가, '겁탈' 당할 뻔한 상황에서, 송태하를 우연히 만나 구출을 받는다.
5. 송태하를 따라 나선다.
6. 송태하의 '결혼'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혼한다.
7. 자신을 사랑하던 대길이와 다시 3자 대면을 한다.
8. 송태하를 계속 따른다.
9. 송태하를 따라 중국행을 결심한다.
이와 같은 행적의 과정을 겪는다.
쭉 보면 알 수 있지만,
1) 스스로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 선택의 과정이 빈약하다.
2) '언년이' 그녀 스스로가 당면한 '갈등'의 '근원'이 아주 소박하다.
3) 그녀가 행적을 옮겨가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연결되지 않고 있다.
이를 하나씩 생각해 보자.
[언년이 행적의 성격]
1) 수동적인 행위 선택
'언년이'가 '노비'로 살던 대길이의 집을 도망친 것은 오빠를 따라서이지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언년이'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오빠'의 품을 탈출한 것은, 소위 수동적인 '가출'로 볼 수가 있지, 적극적인 인생 '개척'의 의미가 적다.
'언년이'가 방향성 없이 방황하다가 송태하(오지호 분)를 만나서 그를 따라나선 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다.
'언년이'가 중국으로 가야 하는 것은, 송태하가 가고자 해서이지, 언년이 스스로가 '결심'한 게 아니다.
2) '갈등의 근원'의 소박함
'추노'의 인물들을 보면, '추노'의 소재와 주제답게 '거시적'이고 '사회 구조적'인 담론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송태하는 '국가 권력'을 바꿔보고자 했고, 노비당은 '사회 계급 구조'가 바뀌는 것을 꿈꿨다.
좌의정 이경식이나 황철웅, 기타 양반 무리들은 '권력'의 '탐욕'에 눈멀어 있었다.
대길이와 최장군, 왕손이, 천지호 같은 '추노 무리'들도 비교적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들도 '체제'에 순응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사회 시스템' 하의 삶의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은 이런 '갈등의 근원'을 이해하고 있고, 충분히 갈등의 내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외부로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언년이'의 갈등은 매우 소박하게 그려진다.
오빠와 함께 대길이 집을 도망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빠'가 결혼시키려고 하니까, 그것이 싫어서 '가출'을 했다.
그 이후에 갈등 상황은 매우 약하다.
송태하를 따라 다니다가, 그와 결혼을 하게 되고,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대길이'(장혁 분)에 대한 '정(精)'을 덜어낸다.
'추노'의 전반적인 전개 내용에서 보면, 대길이를 버리고 송태하를 선택하는 그 과정이 언년이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갈등 상황'으로 진지하게 그려져야 하지만, 결코 그렇지 못했다.
특히, 언년이가 대길이의 생존을 '인지'하고 그를 눈 앞에서 보고, 또 3자 대면까지 하게 되지만, 언년이의 '갈등 상황'이 증폭되거나, 다시 확대되어 드러나지 않는다.
대길이를 보왔어도, 언년이는 그대로 '송태하'를 따라 나설 뿐이다.
여기서 엄청나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10년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대길이'를 어떻게 눈 앞에서 보고 만났는데, '갈등'이 순식간에 없어질 수가 있는가? 마치 삼자 대면 이후에는 대길이와 언년이는 혹 '남남'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심각하게 말하면, 대길이가 '언년이' 짝사랑해서 좇아다닌 것처럼 생각될 지경이다.
3) '언년이'의 행적 이동 경로가 설득력 있지 않다.
위와 똑같은 얘기지만, 언년이가 '가출'한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녀가 왜 굳이 송태하를 따라나서고,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급기야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인지 충분히 설득력있게 연결고리가 엮여서 전개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대길이와 만났어도, 언년이의 내적인 '원초적 갈등'이 크게 드러나고 있지 않다.
'어, 대길이 너 왔니?' 이런 식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후 언년이는 단지 '송태하'와 '결혼'하게 되는 것만으로, 언년이 스스로의 '갈등 상황'은 이후 완전히 제거된다. 극에 전혀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대길이가 '이유없이' 따라다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언년이는 '송태하'의 '딸랑이'일 뿐이다. 그냥 송태하의 그림자로만 나타난다.
따라서, 작가가 '언년이'의 캐릭터를 잘 살리는데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언년이의 상징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년이는 '추노'라는 드라마에서 주제를 형상화 하는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추노'의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대주제'로써의 '상징성'을 가진다.
왜 그럴까?
결국은 '소박한 것이다.'
'사회 체제' 하의 '개인의 가치'라는 것도 소박한 것이라는 것이다.
'언년이'가 바라는 '꿈'이나 그녀가 추구하는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인생을 제도나 계급에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고, 그것을 보장받으며 소박하게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녀는 '내가 이 사회를 바꾸겠다'와 같은 거창한 꿈을 꾸지는 않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겠다, '주체적인 삶다운 삶'을 살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다.
언년이 그녀는 '매우 평범한 보통의 여자'다. 그녀는 '일상적인', '보통의' 삶을 상징한다.
그런데, 가장 소박한 꿈을 꾸는 언년이에게 '추노' 전반의 현실은 가장 냉혹하다.
'언년이 민폐 리스트'가 나올만큼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생을 마감하며 무수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은, 그녀의 이러한 소박한 '삶'조차도 쉽게 보장받을 수 없는 모순된 시대와 제도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언년이' 캐릭터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언년이' 캐릭터는 작가의 의도적 '실패'로도 볼 수 있다.
우리 인생과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언년이'처럼 소박한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큰 꿈'을 꾸지 않아도, '과한 것'을 탐내지 않고도, 소박하게 자신의 가치를 존중받으면서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많은 것이 우리를 족쇄처럼 붙들고 있다.
하다못해 오늘날의 '이북'의 사람들은 엄청난 '독재'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언년이'의 삶도 과분한 것이 아닐까?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언년이'의 삶이 과분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한편, '언년이'는 '사랑받는 존재'다.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다.
1) 언년이는 사랑받는 존재다.
대길이도 그녀를 사랑했고, 송태하도 그녀를 사랑한다. 대길이에게 그녀는 10년 이상을 기다린 '꿈'이고, 죽어서도 그리는 '꿈'이다. 송태하에게 그녀는 현재의 '꿈'이다.
사랑받는 것은 그대로 온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사랑받는 대상의 상처받지 않을 '온전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언년이는 중요하다.
2) 다음으로, 언년이는 사랑하는 존재다.
언년이는 왜 대길이 대신에 송태하를 선택했는가?
대길이가 자신을 사랑해주었지만, 그것은 대길이가 자신을 좋아한 것이고, 그것은 '과거의 사랑'이다.
반면에, 언년이가 선택하고 '결혼'을 결심한 송태하는, 자신의 '내심의 자유'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현재의 사랑'이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방황하던 영혼에서 '사랑의 주체'를 발견하고 사랑을 결심한 언년이는 '사랑의 자각'을 깨달은 '사랑하는 존재'다.
'사랑하는 존재'도 보호되어야 하고, '사랑받는 존재'도 보호되어야 한다.
[추노의 대주제, 언년이로 향한다]
이 점에서 추노 마지막회의 대길이는 '추노'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주제를 읊조린다.
'(사랑한다 언년아) 그러니 잘 살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다. 잘 살라는 것이다. 열심히 '사랑' 받고, 열심히 '사랑'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든 억압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자유와 영혼의 가치를 만끽하며, '잘 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잘 살고 싶어 했던 대길이의 최후의 죽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제약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런 현실 제도적 폐악, 악습은 없어져야 한다, 없애야 한다.
반면에, 대길이의 죽음을 통해 이후의 '삶'을 보장받는 언년이는 그러한 제도적 폐악이 없는 보다 자유롭게 열린 공간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우리 모두의 '권리'와 '의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추노의 잠정적인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것이 추노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은 비단 '언년이'에게만 국한된 '의무'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대길이'의 바람처럼 '언년이' 이상으로 잘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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