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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에 다니는 김예슬양이 최근에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는 글을 밝혀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20대 초반의 여학생이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해서'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그런 '진지함'이 우선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고 소감을 밝히고 싶다.
글을 보면 무언가 악의가 보이지 않는 '진실'이 담긴 마음 속에서의 진지한 고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학교 대자보로 밝힌 이 글에서 그녀는 '대학은 그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대학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그녀의 글에는 깊게 논의해볼 여러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 몇 개의 글로 그녀가 '화두'를 던진 대학과 대학생활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그 첫째로 필자는 제목에서 밝혔듯이, '대학(大學)에는 답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공통적인 제도교육을 탈피하여 대학교(大學校)에 진학하면, 뭔가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도 그랬다. (* 양희은 '숲' 듣기 , 한대수 '바람과 나' 듣기)
이제까지의 모든 물리적, 정신적 생활을 바꿔줄 새로운 '혁신'으로서 '대학'을 기대했다.
왜 그랬을까?
'대학'은 남다른 '공간'이라고 우리의 '선입견'으로 이미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환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중고등학교에서 대학 진학만을 바라보며 고군분투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입학해 보면 기대했던 것보다 '별 거' 없다.
물론 대학교 신입생 새내기 시절에는 뭔가 달라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대학교도 역시 '사람이 사는',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생활의 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반면에, 이제 대학생이 되는 인생의 순간에서는 젊음의 여러 방황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육체적인 혼돈과 재정비가 '사춘기'에 일어난다면, 정신적인 것은 '대학 시절', 특히 '대학 초년' 시절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청소년기에 '정신적 방황'이 용납되지 않거나, 그런 상황적 조성이 용이하지 않은 우리 청소년의 성장 환경에서는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재탄생'하는 20대 초반의 인생의 순간에, 지금 그들이 놓여있는 '대학'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하고 '정신적인 회의 또는 반문'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김예슬 양의 경우에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예슬 양의 경우, 대학 3학년 전후라고 생각하므로 어엿한 대학생이지만, 달리보면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갓 4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 '양면성'이 있다.
줄곧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생활을 하다가, '대학' 처럼 열린 공간에 들어섰을 때는 방황하게 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방황의 이유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작용한다.
1) 첫째, '대학'이 주는 너무 많은 '자유' 를 누리느라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
2) 둘째, '대학'이 주지 못하는 너무나 제한된 '자유'로 인해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3) 셋째, '대학'의 '일상적인 모습'에 실망하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4) 넷째, '대학'을 향한 열렬한 진리탐구를 위해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대학에서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방황'이 아닐까?
이런 '방황'은 반드시 생겨나고,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학은 최종적인 답을 줄 수가 없다.'
'대학'은 '대학'일 뿐이다.
'대학'은 '나'를 둘러싼 공간이지, '내'가 '대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예슬 양은 자신이 들고 서있던 팜플랫에서 '오늘 저는 대학을 그만 둡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기에...'라고 호소했다.
그녀의 이런 '방황'은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대학에는 답이 없다.'
'진리'(眞理), '우정'(友精), '정의'(正義)는 '대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의 소유라거나 '대학'의 속성이 아니다.
그녀가 지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진리', '우정', '정의'는 그녀의 '인생'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나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을 둘러싼 '나의 것', '자신의 것'이지 '대학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학에는 답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김예슬 양은 '대학'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아나서야 하는 것을 '대학'으로 슬쩍 밀어넣고 있다.
필자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다. 아니 이 시대의 모든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대학에는 답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대학은 자신의 인생(人生)을 도와주는 공간일 뿐이다.
'인생'이나 '대학'의 가치는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대학'이라는 석고 구조물에 불변의 돌덩이마냥 '묻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이 모든 것을 가져다줄 것인마냥 기대하는 우리의 '정신적 오만'부터 빨리 깨버려야 한다.
필자도 그런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랜 시간 후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눈치챌 것'이면 빠를 수록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얘기들을 진행시켜 보고자 한다.
[관련글] 대학에는 답이 있다 _김예슬의 대학 선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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