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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4.03 대학에는 답이 있다 _김예슬의 대학 선언 (2) 3
  2. 2010.03.27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살아가는 행복의 의미는?
  3. 2010.03.24 법정스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다소 되므로, 이전 글을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앞에 글에서는 '대학은 자신의 인생을 도와주기 위한 보조 공간일 뿐이므로, 진리, 우정, 정의와 같은 가치는 자기 인생에서 스스로 찾아나서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학(大學)은 무엇인가? 대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인가?

저번 글에서는 '대학에는 답이 없다'고 밝혔지만, 이번 글에서는 감히 '대학에는 답이 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김예슬양은 그녀의 글을 학생들에게 공개하며 스스로 '자퇴'할 생각이 있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그녀가 정말로 '자퇴'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그녀의 '자퇴'를 적극적으로 만류한다.


앞서 글에서 밝혔듯이, 대학에서 '자퇴하느냐, 마느냐'하고 매달리는 것은, 대학을 너무 과분하게 보기 때문이다.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집착'을 벗어던지면 '대학'은 이미 '별 거' 아니다.

고려대 김예슬의 '고민'과는 달리 필자는 이미 대학시절에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자퇴'해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어찌보면 필자가 김예슬 양보다는 '고단수'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필자의 '자퇴 경험'의 동기는 그녀의 '진지함'에 비하면 비교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그 맥이 닿아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중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을 여러본 '자퇴'해 본적이 있는 필자는, 그러면 '대학 자퇴생'인가?

그렇지는 않다. 필자는 이미 '대학'을 졸업했다.

'자퇴'를 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 '대학'이다. 그것은 '지성'(知性)을 갈구하는 '인생'들에게 '필연'일 수 밖에 없다.

김예슬 양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대학을 그만둔다고 해도, '대학'은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공간이다.


왜 그럴까?

'대학(大學)에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저번의 글 '대학에는 답이 없다'는 명제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 명제는 절대 틀린 얘기가 아니다.

'대학교'(大學敎)에는 반드시 답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대학'(大學)에는 필연적으로 답이 있다.

'대학'은 '진리체계'와 사실상 거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김예슬이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에서 밝힌 '대학'의 의미도 '대학교'를 말하는 것이지 '대학'을 거부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문제삼고 있는 상황은 '대학교'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왜 그녀에게 대학에 남을 것을 조언하고, '대학에는 답이 있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다. '대학에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진리체계'는 주로 '대학교'에서 연구한다.

김예슬 양이 문제삼은 '대학'의 현실은 사실상 '대학교 학부 과정'의 문제일 뿐이지, '대학'이나 '대학교' 자체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다.

그녀나 당시 또래의 필자나 '대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줘야 하는 것처럼, 대학에게 모든 것을 밀어넘겼던 지적 오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지만, 그것은 '학부 과정'에서의 논제 상황인 것이지, '대학' 자체의 문제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학문은 '대학원' 과정부터 진행된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진정한 학문으로서 '대학'은 대학에 남아 연구하는 '대학 구성원'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학부 과정'에서 너무 많은 '학문적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지금 대학교 학부과정에 몸 담고 있거나, 앞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될 이들이 실망할 수도 있지만, 대학교 학부체계는 그 전공에서 본다면 실로 기초적인 기본 소양을 제공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더라도, 기본 4년, 혹은 기본 6년을 마쳐도 제대로 된 의사의 기능을 수행할지는 미지수이다.
'전문 전공'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문,사회,자연,공학 학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는 '학부 과정'이 수업만을 놓고 따진다면, 그 학문 체계에 기본 소양이 있는 '준 전문인'을 양성하는 과정이라고 살짝 양보해 주어야 한다.

이를 넘어서서 '진정한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대학원(大學院)에 진학하거나 어떤 식이든 연구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그런 연구활동이 계속되는 공간으로서, '대학(大學)은 여전히 답이 있고, 학문의 전당으로서 계속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랬지만, 김예슬 양이 놓치고 있는 점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학부과정이 모든 것을 가져다 주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자신의 '지적 오만'이다. 오히려 '오해'일 수도 있다. 악의적으로 '오만'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므로, 사실상 '오해'하고 있는 것인데, 경험상 쉽게 발견할 수 없으므로, 결국 '학부생활'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정말로 '진리'(眞理)를 찾아나서고, '대학(大學)의 참가치'를 만끽하고자 한다면, 학문을 향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부 과정은 정말로 '세발의 피다.' 그것은 넓은 학문세계에서 본다면 기초적인 '맛만 보여주는 정도'에 다름아니다.  

학부 과정에 큰 진리가 숨어있을 것으로 본다면, 학부생들이 아주 일상적인 큰 오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학부 과정은 '대학의 맛'을 슬쩍 보면서 대부분 지나치는 공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사회에 배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넓게 보면 '기본 소양'이다. 


그러면, 학부 졸업생이 대부분인 '대학'은 정말로 아무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학부 과정에서도 정말로 다양한 교양수업, 전공수업이 존재한다. 

자신의 '진리를 향한 탐구열'은 학부에서도 충분히 불태울 수 있다. 

예컨대, 김예슬 양이 지닌 고민이라면, '철학'과 관련한 여러 제수업, '정치학'이나 '사회학', 각종 '인문학'과 관련한 제수업에서 충분히 풀 수 있고, 다루는 주제들이다. 

그런데, 김예슬양의 전공을 보면 '경영학'이다. 필자도 '경영학'의 커리큘럼 정도는 알고 있다. 

필자가 보건데, 김예슬 양의 경우에는 자신의 전공인 '경영학' 전공 수업에 파묻혀 정말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학의 현실과 묘미를 제대로 만끽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가 다닌다는 대학도 이미 제공하는 '커리큘럼' 내에 있다. 

그녀가 그걸 몰라서 찾아나서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인생'이나 '세계', 그녀가 고민한 '자본' - '국가' - '노동' - '교육'의 관계를 해명해 줄 학교 수업도 이미 대학교 학부 과정 내에서 존재하고 있다. 왜 대학이 '지식 노농자'를 생산해 내는지, 그 매커니즘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 여러 수업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그녀 스스로이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주변의 조언자가 없기 때문에 대학에 이런 '현실'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학부과정에서도 절대 답이 없는게 아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대학에는 답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을 향해 가려면, 학부과정을 넘어서서 석사, 박사 과정을 향해 연구와 함께 진행시켜 가야 하므로 대학에는 답이 있다는 것이고, 

학부 과정에서도 충분히 자신이 지녔던 인생 선배들의 고심과 진리 체계를 접할 수 있으므로, 역시 대학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석사', '박사'라는 '학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만큼이나, '진리 체계'도 절대적이라거나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게 '대학'이다. 

인간 존재의 '겸손'을 깨닫고, 조금 더 알고자 '노력'해 가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법정스님이 1992년 이후 거주했다고 하는 오대산 오두막

이 정도로 대학에는 답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대학이 모든 것을 채워줄 수는 없다. 인생은 저마다 자기 스스로 행복을 찾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타계하신 '법정스님'이 대학교에서 석사, 박사를 안했다고 '대학'을 찾아나서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법정스님께서는 '참 인생을 향한 대학을 하신 것이다.'

결국, '대학'은  인생 전반에 걸쳐서 '대학교', '대학원'이라는 공간 유무를 떠나 논의되어야 하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이 절대 답이 없는 유리된 장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 학부과정'이 모든 학생을 '법정스님'과 같은 '도량'으로 배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김예슬 양의 고민이 인생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결정인 것 같지만,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대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으로부터, 선인(先人)이나 정돈된 진리체계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것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공간은 '대학'이다. 그리고 새로운 진리체계를 탐구한다.

애초에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 남들로부터 배우고 제공받은 것이다. 거기에 조금 보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예슬 양의 고민을 바깥의 사회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약 4년간 유예된 대학생활에 비해, 사회라는 공간은 어떻게 보면 '생활에 찌들리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 현실 공간에 대한 '고민'은 조금 떨어져서 '대학'에서 잠시 크게 조망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사회에도 좋다.

'대학'에서 자꾸 스스로의 대학 만을 들여다보려는 '편혐합'을 버리고, '사회'를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대학을 떠나 사회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지'를 풀려면 어떤 식으로든 '대학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가  많고, '학사 학위'는 필요하다.
이런 인생 선배의 먼저 깨달은 '경험'을 많이 참고했으면 좋겠다.

[관련글]
대학에는 답이 없다 _김예슬의 대학 선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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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10점
법정(法頂) 지음, 류시화 엮음/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법정스님께서 입적하기 직전에 삶을 정리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최후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 하나로 법정스님의 산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서 그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시면서, 많은 책들이 절판되거나 품절되어서 구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도 그 중에 한 권이었다.
그런데, 물량을 맞추기 위해 재고를 풀어서인지, 다행이 이 책을 구입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법정스님께서 잠언으로 남긴 주요 말씀을 시인 류시화가 엮은 것으로 2006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 2010년 3월까지 198판이 이
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법정스님께서 젊었던 시절부터 말씀하신 '무소유'를 비롯하여, '말과 침묵'과 같은 주요 말씀의 꼭지와 담겨 있다.

그래서 법정스님의 젊은 날의 저서를 힘들게 구하려 하지 말고, 이 잠언집으로 대신해 보라는 의견도 많다.

법정스님의 글은 아주 짧고 단순한 문장으로 나타난다. 엄청나게 간결하다.
필자와 같은 범인들이 즐겨하는 지지부진하면서 별 내용없는 문장은 남발하지 않는다.

짧고 평이한 문장과 문체지만 엄청나게 의미있는 내용을 담는다. 그것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문장에는 쉽게 따르기 힘든 힘이 있다.

그것이 법정스님 문체의 특징이다. 이 시대의 그 어떤 문필가, 수필가도 따를 수 없는 당신의 문체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기에 불교
수행자이기 이전에, 법정스님은 이 시대의 탁월한 수필가였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릴 만큼 사랑받은 이유도, 그만큼 글이 쉽고 간결하게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

이런 문체에는 법정스님의 간결하지만 깊은 '사색'과 '정신'이 담겨 있다. 문체를 넘어서는 '의미'를 충분히 담아낸 것이다.

그러면,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잠언집에 담긴 몇 꼭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말과 침묵]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남을 꾸짖는다.
그는 쉼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킨다.
필요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다. 왜 그런가?
'말'을 많이 하면 확률적으로 남에게 상처줄 가능성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근본 이유는 '생각'을 안하고 '말'부터 내뱉는 것에 있다. 
남에게 허튼 소리를 하여 '상처'를 줄 바에야 차라리 '침묵'을 하는게 낫지 않은가.
그래서 '침묵은 금'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무소유의 삶]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켜 이루어진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필요한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면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다.

불필요한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내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므로, 탐을 내어 '쟁취'해야할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큰가?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세상'의 '전부'를 탐내야 한다.
소유와 무소유의 경계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것'에 손을 뻗기 시작하면, 소유를 위한 경계는 무한히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경계'를 만들어 내고, 외연을 키워 나가는 잣대는 '마음' 속에 있다.
이런 마음의 경계를 다스리려면,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엮여져 있는 '연기'(緣起)의 삶을 살고 있다.
'내 것', '네 것'을 나누어 경계를 삼고, '소유'만을 따지며 추구하는 것은 서로 '연기'되어 있는 우리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 연기되어 있다고 깨닫는 순간, 우리가 할 일은 서로 돕고 함께 개척해 나가는 것이지, 누구를 배척하고, '내 것'을 따지는 '소유'가 아니다.

이런 의미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글이나 문체는, 필자와 같은 범인(凡人)의 글쓰기와는 너무나 다가설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모두가 다다를 수 있는 '참 뜻'의 길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입적을 앞두신 말년에 꼭 남기고 싶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법정스님의 일생을 두고 남기신 많은 말씀의 꼭지들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삽화와 함께 하고 있어서 들여다보면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 준다.

법정스님의 여러 저서를 이번에 새롭게 접하면게 새삼 느끼는 점은, 문장형식이 이처럼 매우 간결하다는 것이다.
범인(凡人)들이 쉽게 보고 깨우칠 수 있도록 쉽게 쓰셨을 것이다. 그래서 재미있게 보면서 깨우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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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법정스님께서 남기신 몇몇 말씀의 꼭지를 회차를 나누어 읊조려보고자 한다.
                                   
반갑게도 법정스님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산문집을 오늘 구하게 되었다.

최근에 법정스님이 입적하시면서, 많은 책들이 절판되거나 품절되었는데, 이 책도 그 한 권이었다.
그런데, 수요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출판사가 재고판을 많이 내놓은거 같다. 그래서 이 책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법정스님께서 잠언으로 남긴 주요 말씀을 시인 류시화가 엮은 것으로 2006년에 초판이 나왔고, 2010년 3월 초에 198판이 나왔다.
이 책에는 '무소유', '말과 침묵'과 같은 법정스님이 이전에 남긴 주요 말씀의 꼭지가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굳이 법정스님의 젊은 날의 저서를 힘들게 구하려 하지 말고, 이 잠언집으로 대신해 보라는 의견도 많은 거 같다.

법정스님의 글을 보면 아주 짧고 단순한 문장으로 글을 쓴다. 엄청나게 간결하다.
필자와 같은 범인들처럼 아주 지지부진하면서 별 내용없는 문장은 남발하지 않는다.

문장은 짧고 평이한 언어지만 엄청나게 의미있는 내용을 담는다.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문장에는 힘이 있다.

그것이 법정스님 문체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그 어떤 산문집, 산문가, 수필가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문체를 쉽게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불교를 수행하는 불자이기 이전에, 법정스님은 이 시대의 탁월한 수필가였던 것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글이 사랑받은 이유도, 그 글이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쉽고 간결하게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체에는 법정스님의 간결하지만 깊은 '사색'과 '정신'이 담겨 있다. 문체를 넘어서는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그러면,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잠언집에 담긴 몇 꼭지를 살펴보자.

  


[말과 침묵]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남을 꾸짖는다.
그는 쉼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킨다.
필요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다. 왜 일까?
'말'을 많이 하면 확률적으로 남에게 상처줄 가능성이 올라간다.
그러나 그보다는 '생각'을 안하고 '말'부터 내뱉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훨씬 많다.
남에게 허튼 소리로 불필요한 '상처'를 줄 바에야 차라리 '침묵'을 하는게 낫다.
그래서 '침묵은 금'일 수 있다.


[무소유의 삶]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켜 이루어진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 하라는 것이다.
불필요한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내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탐을 내야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큰가?
소유와 무소유의 경계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내 것을 아닌 세상의 것'에 손을 뻗으면 소유를 향한 경계는 무한히 커질 것이다.
그런 경계를 결정짓는 잣대는 '마음' 속에 있다.

그런 마음의 경계를 다스리려면, '지혜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엮여져 있는 '연기'(緣起)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각성해야 한다. 자꾸 '내 것', '네 것'을 나누어 경계를 삼고, '소유'를 추구하는 것은 서로 이렇게 '연기'되어 있는 것을 망각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서로 연기되어 있다고 깨닫는 순간, 우리가 할 일은 서로 돕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지, 네 것을 배척하고, 내 것을 따지는 '소유'가 아니다.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법정스님이 쓰는 글이나 문체와, 필자와 같은 범인의 글쓰기 방식은 너무나 다가설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입적을 앞두신 말년에 당신께서 꼭 남기고 싶은 말씀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 책에는 일생을 두고 남기신 많은 꼭지들이 있다. 그리고 삽화와 함께 하고 있어서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 준다.

법정스님의 여러 저서를 이번에 새롭게 접하면서 새삼 느끼는 점은, 문장형식이 이처럼 간결하다는 것이다.
범인(凡人)들이 쉽게 보고 깨우치라고 쉽게 쓰신거 같다. 그래서 재미있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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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서적 싸게 구입하기, 남기신 저서 주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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