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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김예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4.03 대학에는 답이 있다 _김예슬의 대학 선언 (2) 3
  2. 2010.04.03 대학에는 답이 없다 _김예슬의 대학 선언 (1) 1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다소 되므로, 이전 글을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앞에 글에서는 '대학은 자신의 인생을 도와주기 위한 보조 공간일 뿐이므로, 진리, 우정, 정의와 같은 가치는 자기 인생에서 스스로 찾아나서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학(大學)은 무엇인가? 대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인가?

저번 글에서는 '대학에는 답이 없다'고 밝혔지만, 이번 글에서는 감히 '대학에는 답이 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김예슬양은 그녀의 글을 학생들에게 공개하며 스스로 '자퇴'할 생각이 있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그녀가 정말로 '자퇴'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그녀의 '자퇴'를 적극적으로 만류한다.


앞서 글에서 밝혔듯이, 대학에서 '자퇴하느냐, 마느냐'하고 매달리는 것은, 대학을 너무 과분하게 보기 때문이다.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집착'을 벗어던지면 '대학'은 이미 '별 거' 아니다.

고려대 김예슬의 '고민'과는 달리 필자는 이미 대학시절에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자퇴'해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어찌보면 필자가 김예슬 양보다는 '고단수'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필자의 '자퇴 경험'의 동기는 그녀의 '진지함'에 비하면 비교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그 맥이 닿아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중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을 여러본 '자퇴'해 본적이 있는 필자는, 그러면 '대학 자퇴생'인가?

그렇지는 않다. 필자는 이미 '대학'을 졸업했다.

'자퇴'를 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곳이 '대학'이다. 그것은 '지성'(知性)을 갈구하는 '인생'들에게 '필연'일 수 밖에 없다.

김예슬 양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대학을 그만둔다고 해도, '대학'은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공간이다.


왜 그럴까?

'대학(大學)에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저번의 글 '대학에는 답이 없다'는 명제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 명제는 절대 틀린 얘기가 아니다.

'대학교'(大學敎)에는 반드시 답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대학'(大學)에는 필연적으로 답이 있다.

'대학'은 '진리체계'와 사실상 거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김예슬이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에서 밝힌 '대학'의 의미도 '대학교'를 말하는 것이지 '대학'을 거부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문제삼고 있는 상황은 '대학교'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왜 그녀에게 대학에 남을 것을 조언하고, '대학에는 답이 있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다. '대학에는 답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진리체계'는 주로 '대학교'에서 연구한다.

김예슬 양이 문제삼은 '대학'의 현실은 사실상 '대학교 학부 과정'의 문제일 뿐이지, '대학'이나 '대학교' 자체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다.

그녀나 당시 또래의 필자나 '대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줘야 하는 것처럼, 대학에게 모든 것을 밀어넘겼던 지적 오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지만, 그것은 '학부 과정'에서의 논제 상황인 것이지, '대학' 자체의 문제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학문은 '대학원' 과정부터 진행된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진정한 학문으로서 '대학'은 대학에 남아 연구하는 '대학 구성원'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학부 과정'에서 너무 많은 '학문적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지금 대학교 학부과정에 몸 담고 있거나, 앞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될 이들이 실망할 수도 있지만, 대학교 학부체계는 그 전공에서 본다면 실로 기초적인 기본 소양을 제공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더라도, 기본 4년, 혹은 기본 6년을 마쳐도 제대로 된 의사의 기능을 수행할지는 미지수이다.
'전문 전공'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문,사회,자연,공학 학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는 '학부 과정'이 수업만을 놓고 따진다면, 그 학문 체계에 기본 소양이 있는 '준 전문인'을 양성하는 과정이라고 살짝 양보해 주어야 한다.

이를 넘어서서 '진정한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대학원(大學院)에 진학하거나 어떤 식이든 연구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그런 연구활동이 계속되는 공간으로서, '대학(大學)은 여전히 답이 있고, 학문의 전당으로서 계속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랬지만, 김예슬 양이 놓치고 있는 점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학부과정이 모든 것을 가져다 주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자신의 '지적 오만'이다. 오히려 '오해'일 수도 있다. 악의적으로 '오만'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므로, 사실상 '오해'하고 있는 것인데, 경험상 쉽게 발견할 수 없으므로, 결국 '학부생활'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정말로 '진리'(眞理)를 찾아나서고, '대학(大學)의 참가치'를 만끽하고자 한다면, 학문을 향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부 과정은 정말로 '세발의 피다.' 그것은 넓은 학문세계에서 본다면 기초적인 '맛만 보여주는 정도'에 다름아니다.  

학부 과정에 큰 진리가 숨어있을 것으로 본다면, 학부생들이 아주 일상적인 큰 오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학부 과정은 '대학의 맛'을 슬쩍 보면서 대부분 지나치는 공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사회에 배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넓게 보면 '기본 소양'이다. 


그러면, 학부 졸업생이 대부분인 '대학'은 정말로 아무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학부 과정에서도 정말로 다양한 교양수업, 전공수업이 존재한다. 

자신의 '진리를 향한 탐구열'은 학부에서도 충분히 불태울 수 있다. 

예컨대, 김예슬 양이 지닌 고민이라면, '철학'과 관련한 여러 제수업, '정치학'이나 '사회학', 각종 '인문학'과 관련한 제수업에서 충분히 풀 수 있고, 다루는 주제들이다. 

그런데, 김예슬양의 전공을 보면 '경영학'이다. 필자도 '경영학'의 커리큘럼 정도는 알고 있다. 

필자가 보건데, 김예슬 양의 경우에는 자신의 전공인 '경영학' 전공 수업에 파묻혀 정말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학의 현실과 묘미를 제대로 만끽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가 다닌다는 대학도 이미 제공하는 '커리큘럼' 내에 있다. 

그녀가 그걸 몰라서 찾아나서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인생'이나 '세계', 그녀가 고민한 '자본' - '국가' - '노동' - '교육'의 관계를 해명해 줄 학교 수업도 이미 대학교 학부 과정 내에서 존재하고 있다. 왜 대학이 '지식 노농자'를 생산해 내는지, 그 매커니즘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 여러 수업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그녀 스스로이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주변의 조언자가 없기 때문에 대학에 이런 '현실'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학부과정에서도 절대 답이 없는게 아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대학에는 답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을 향해 가려면, 학부과정을 넘어서서 석사, 박사 과정을 향해 연구와 함께 진행시켜 가야 하므로 대학에는 답이 있다는 것이고, 

학부 과정에서도 충분히 자신이 지녔던 인생 선배들의 고심과 진리 체계를 접할 수 있으므로, 역시 대학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석사', '박사'라는 '학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만큼이나, '진리 체계'도 절대적이라거나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게 '대학'이다. 

인간 존재의 '겸손'을 깨닫고, 조금 더 알고자 '노력'해 가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법정스님이 1992년 이후 거주했다고 하는 오대산 오두막

이 정도로 대학에는 답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대학이 모든 것을 채워줄 수는 없다. 인생은 저마다 자기 스스로 행복을 찾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타계하신 '법정스님'이 대학교에서 석사, 박사를 안했다고 '대학'을 찾아나서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법정스님께서는 '참 인생을 향한 대학을 하신 것이다.'

결국, '대학'은  인생 전반에 걸쳐서 '대학교', '대학원'이라는 공간 유무를 떠나 논의되어야 하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이 절대 답이 없는 유리된 장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 학부과정'이 모든 학생을 '법정스님'과 같은 '도량'으로 배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김예슬 양의 고민이 인생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결정인 것 같지만,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대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으로부터, 선인(先人)이나 정돈된 진리체계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것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공간은 '대학'이다. 그리고 새로운 진리체계를 탐구한다.

애초에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 남들로부터 배우고 제공받은 것이다. 거기에 조금 보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예슬 양의 고민을 바깥의 사회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약 4년간 유예된 대학생활에 비해, 사회라는 공간은 어떻게 보면 '생활에 찌들리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 현실 공간에 대한 '고민'은 조금 떨어져서 '대학'에서 잠시 크게 조망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사회에도 좋다.

'대학'에서 자꾸 스스로의 대학 만을 들여다보려는 '편혐합'을 버리고, '사회'를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대학을 떠나 사회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지'를 풀려면 어떤 식으로든 '대학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가  많고, '학사 학위'는 필요하다.
이런 인생 선배의 먼저 깨달은 '경험'을 많이 참고했으면 좋겠다.

[관련글]
대학에는 답이 없다 _김예슬의 대학 선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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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에 다니는 김예슬양이 최근에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는 글을 밝혀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20대 초반의 여학생이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해서'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그런 '진지함'이 우선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고 소감을 밝히고 싶다.

글을 보면 무언가 악의가 보이지 않는 '진실'이 담긴 마음 속에서의 진지한 고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학교 대자보로 밝힌 이 글에서 그녀는 '대학은 그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대학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그녀의 글에는 깊게 논의해볼 여러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 몇 개의 글로 그녀가 '화두'를 던진 대학과 대학생활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그 첫째로 필자는 제목에서 밝혔듯이, '대학(大學)에는 답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공통적인 제도교육을 탈피하여 대학교(大學校)에 진학하면, 뭔가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도 그랬다.  (* 양희은 '숲' 듣기 , 한대수 '바람과 나' 듣기)

이제까지의 모든 물리적, 정신적 생활을 바꿔줄 새로운 '혁신'으로서 '대학'을 기대했다.

왜 그랬을까?

'대학'은 남다른 '공간'이라고 우리의 '선입견'으로 이미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환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중고등학교에서 대학 진학만을 바라보며 고군분투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입학해 보면 기대했던 것보다 '별 거' 없다.
 
물론 대학교 신입생 새내기 시절에는 뭔가 달라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대학교도 역시 '사람이 사는', '생활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생활의 공간임을 깨닫게 된다.


반면에, 이제 대학생이 되는 인생의 순간에서는 젊음의 여러 방황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육체적인 혼돈과 재정비가 '사춘기'에 일어난다면, 정신적인 것은 '대학 시절', 특히 '대학 초년' 시절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청소년기에 '정신적 방황'이 용납되지 않거나, 그런 상황적 조성이 용이하지 않은 우리 청소년의 성장 환경에서는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재탄생'하는 20대 초반의 인생의 순간에, 지금 그들이 놓여있는 '대학'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하고 '정신적인 회의 또는 반문'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김예슬 양의 경우에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예슬 양의 경우, 대학 3학년 전후라고 생각하므로 어엿한 대학생이지만, 달리보면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갓 4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 '양면성'이 있다.

줄곧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생활을 하다가, '대학' 처럼 열린 공간에 들어섰을 때는 방황하게 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방황의 이유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작용한다. 

1) 첫째, '대학'이 주는 너무 많은 '자유' 를 누리느라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

2) 둘째, '대학'이 주지 못하는 너무나 제한된 '자유'로 인해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3) 셋째, '대학'의 '일상적인 모습'에 실망하고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4) 넷째, '대학'을 향한 열렬한 진리탐구를 위해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대학에서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방황'이 아닐까? 

이런 '방황'은 반드시 생겨나고,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학은 최종적인 답을 줄 수가 없다.' 

'대학'은 '대학'일 뿐이다. 

'대학'은 '나'를 둘러싼 공간이지, '내'가 '대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예슬 양은 자신이 들고 서있던 팜플랫에서 '오늘 저는 대학을 그만 둡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기에...'라고 호소했다. 

그녀의 이런 '방황'은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대학에는 답이 없다.'


'진리'(眞理), '우정'(友精), '정의'(正義)는 '대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의 소유라거나 '대학'의 속성이 아니다. 

그녀가 지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진리', '우정', '정의'는 그녀의 '인생'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나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을 둘러싼 '나의 것', '자신의 것'이지 '대학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학에는 답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김예슬 양은 '대학'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아나서야 하는 것을 '대학'으로 슬쩍 밀어넣고 있다. 

필자도 한 때 그런 적이 있었다. 아니 이 시대의 모든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대학에는 답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대학은 자신의 인생(人生)을 도와주는 공간일 뿐이다. 

'인생'이나 '대학'의 가치는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대학'이라는 석고 구조물에 불변의 돌덩이마냥 '묻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이 모든 것을 가져다줄 것인마냥 기대하는 우리의 '정신적 오만'부터 빨리 깨버려야 한다. 

필자도 그런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랜 시간 후에야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눈치챌 것'이면 빠를 수록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얘기들을 진행시켜 보고자 한다. 

[관련글] 대학에는 답이 있다 _김예슬의 대학 선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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